다시 페낭에서 쿠알라룸푸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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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는 날이다. 미리 예약한 기차가 점심때라 오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호텔에서 대충 씻고 덜마른 남방을 입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아침을 먹을까도 고민했지만 별로 입맛이 없다. 그저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먹고 싶었다.
어제 거리를 지나면서 보아둔 카페로 향한다. 빵도 같이 팔고 있었는데, 빵으로 아침을 때우자니 밥값과 비슷하여 돈이 아깝다(식사의 관점에서 밥과 빵의 가치를 생각하면 밥의 가치를 높이 쳐준다.). 그냥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폰을 보면서 어제 보지 못했던 벽화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잠시 카페 앞쪽에 음악소리와 함께 인도계 사람들이 지나간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과 상체가 무척이나 단단해 보인다. 음악과 옷차림을 보니, 인도인들만의 축제 비슷한 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10시즈음 지나자 체크아웃을 위해 슬슬 호텔로 향했다. 아직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선착장으로 가면서 길목에 숨어있는 벽화를 볼 생각이다. 무더운 날씨에 조금 무거운 배낭이 신경쓰였지만 배낭의 부담보다는 여기를 둘러보고 다시 호텔로 가는 것이 더 힘들 것 같아 그늘을 최대한 활용하여 슬금슬금 움직였다.
아쉬운 마음이 자꾸 발길을 잡는다. 무엇이 미련이 남아서일까.. 웬만한 벽화는 이제 다 둘러본 것 같은데, 왠지 숨어 있는 벽화가 더 있을 것 같다. 아쉬움을 남길 수 있는 것들이 참 좋다. 그것이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쉬움이 남기는 것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마음을 그곳에 심는 것과 같다. 예전에는 항상 퍼펙트한 헤어짐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한 헤어짐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안다. 단순히 미련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받아들임이며, 마음속에 심어진 씨앗이 나에게 다시 한번 방문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드디어 페낭섬을 떠난다. 섬의 서쪽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그래도.. 혹시나 다시 오게 될 날을 위해 조금은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예전에 여행을 할 때, 목적지에 도착하면, 마치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구석구석 꼼꼼히 다 보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다. 덕분에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곳도 볼 수 있었지만, 그만큼 육체적 힘듦을 참아야 했다. 예전에 인연이든 물건이든 여운을 남기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여운마저 깡그리 버리는 것이 옳은 것이지 판단을 못할 때가 있었다. 20대에는 다시는 보지 않을만큼, 그런 마음조차 나의 마음속에 남겨두지 않기 위해 여운의 싹을 자르려고 했다. 30대에는 그 여운의 싹을 자르면 자를수록 오히려 더 커져가는 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집착이다... 이제는 여운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가끔.... 40대의 정신과 20대의 육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최고의 인생을 살 자신이 있는데.. 아마.. 내가 10년, 20년 후에는 그때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30대의 육체를 가졌으면.. 40대의 육체를 가졌으면... 그런 것을 보면, 지금의 순간이 가장 건강한 순간이고 가장 최고의 순간임을 잊고 산다...
버터워스 기차역에 너무 빨리 도착했다. 아직 2시간이나 남았다. 또다시 지루함이 밀려온다. 생각해보면,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라카나 페낭으로 이동할 때, 연착이 되거나 너무 이른 시간에 와서 많은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을 모아도 꽤 될듯하다.
마음의 불안감 때문일까? 평소 예약을 하고 출발 시간을 놓치는 법이 없다. 아니, 항상 너무 일찍부터 기다리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 급하게 도착하여 허겁지겁 버스를 타는 것보다 여유있는 것이 좋다. 하지만, 정시에 도착해서 바로 이동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너무 이른 것도 시간낭비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의 불안감만 조그만 내려놓는다면, 시간을 더 알차게 사용했을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고속열차를 탄다. 우리나라 KTX와 비교하면 비슷한 수준이다. 가면서 책을 읽으려고 폈으나 졸음이 밀려온다. 좋은 수면제이다....
늦은 오후, 쿠알라룸푸르의 KL Sentral 역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공항 철도를 탈 수 있는 곳으로 이틀 후, 한국으로 돌아갈 때, 이용할 예정이었다. 내부가 복잡하여 헤매다가 사람들에 물어 지하철을 타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남은 이틀동안 페탈링 야시장 근처 호텔을 예약을 하였는데, 창문이 없는 방임에도 불구하고 가격대비 상당히 만족한 숙소였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페탈링 야시장을 구경하면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본의 아니게 쿠알라룸푸르에 벌써 3번째 오는 일정이라 더이상 가볼 곳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작은 우산을 챙겨 근처에 있는 야시장을 둘러보면서 적당한 가격의 식당을 찾아보았다. 잘란 야시장도 그렇고 페탈링 야시장도 그렇고 특별함은 없다. 그냥 우리나라 전통시장의 느낌...?
시장에서 조금 벗어난 로드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가격도 적당하여 이름도 모를 밥을 주문한다. 맛도 괜찮고 잘 먹고 있는데,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 순식간에 도로는 물로 넘쳐나고 빗물이 내 밥그릇으로 튄다. 빗물을 함께 먹는 것은 상관하지 않지만, 저녁을 먹고 이동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 나갔다가는 30초 안에 싹 젖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고 젖은 생쥐꼴로 돌아다닐 수 없기에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여기 기후 특성상 곧 그칠 것은 알지만 최소 30분이상 내릴 것이다. 비가 정말 무섭게 내린다.
비가 어느정도 잦아 들자 지하철로 부킷빈땅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판단을 잘못한 것이 비는 잦아들었지만 거리는 미처 배수구로 빠지지 못해 흘러가는 빗물로 엉망이다. 운동화를 젖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소용없다. 결국 길을 나선지 5분만에 운동화가 흠뻑 젖었고 찝찝한 느낌이 싫어 다시 호텔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 목적없이 시간을 보내며...
내일 아침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오늘은 몸과 마음이 이끄는대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역시 갈 곳은 부킷빈땅뿐이 없다. 부킷빈땅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지하철로 이동하니, 교통비도 부담이 없다. 지루함에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점심때 즈음, 파빌리온 쇼핑센터에서 사자춤 공연이 있었다. 사자춤을 직접 본 것이 처음이라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더운 날씨를 피해 다시 카페로 들어간다. 여행비를 아낀 덕분인지 10만원 정도 남았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음식들을 먹으며, 최선을 다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루하면 일어나 근처를 돌아다니고 힘들면 다시 카페로 들어가 음료를 마시고를 반복하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근처 맥도널드에 들어가 그동안 부족하게 먹었던 단백질, 더블치킨 버거를 주문한다.
잘란 야시장을 마지막으로 돌아다니며, 마사지를 받을까 생각했지만, 왠지 돈이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쳐 간다. 여기도 이제 지겹다.... 그냥 호텔로 돌아온다. 마지막 밤이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다가 방에서 마시며, 그동안 여행에 대해 되집어본다. 싸구려 낡은 옷들을 입고와서 그런지 청남방의 파란색이 런닝셔츠를 물들여 그냥 버려야 했고 구멍난 양말에서 삐져나온 엄지발가락이 이제 양말을 보내주라고 말하는 듯했다. 가져온 옷들은 누더기가 되어 엉망이 되었고 다시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옷들이 반으로 줄었다.
취기가 올라온다. 아쉬움 반,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반이 모여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만들어 갔다.
▣ 여행을 마치며...
말레이시아 여행은 나중에 다시 오고 싶을만큼 만족감이 높았다. 저렴한 가격과 친절한 사람들, 민족마다 톡득한 건축양식과 어울림, 특색있는 도시.. 언젠가 다시 올 것 같다. 가끔, 체력과 여행 스타일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확실히 나이가 들고 체력이 떨어지니 도전적이고 모험이 가득한 여행보다는 안정적이고 여유있는 여행 스타일로 바뀌는 듯하다.
여행 스타일이 체력과 환경에 따라 계속 바뀌듯 우리의 생각도 환경과 경험으로 인해 바뀐다. 그래서 삶을 여행이라 생각한다. 곧 하늘의 뜻을 깨달은 지천명이 되지만 아직도 좌충우돌하며 경험을 축척해 간다. 그저, 바라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가치가 보편 타당한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게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