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지 Feb 10. 2021

망원동 노란집 이야기


망리단길 끝자락, 벽돌이 노란 3층집.

사실 노란색 이라기보단 황토색의 이 집을, 나는 어떻게든 ‘예쁘게’ 이름 붙여주고 싶었나 보다. 즐거웠던 날 보다, 힘든 날이 더 많았던 이 집을 – 나는 <망원동 노란집>이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길을 잃은 나침반의 기분>의 조금 더 뒷 이야기이자, 어디에도 하지 않은- 조용히 사라진 나의 첫번째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망원동 노란집은, 내가 2019년도 말부터, 2020년도 중순까지 – ‘고작’ 반년 조금 넘게 운영했던 나의 첫번째 공간이었다. 사실 ‘운영’의 정의가 모호해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간을 가지고 수입을 벌었던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나는 회사 시절부터 하숙을 운영하기도 했다) 여타 공간들과 확실히 다른 점은, 내가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망원동 노란집은 서울에서는 꽤나 큰, 독채 숙소였다. 복층으로 이어진 2,3층에서는 20명이 넘는 단체손님을 받기도 하고, 외국에서 3대가 함께 온 가족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리고 1층에는 나를 2년 넘게 도와준 몽골인 아르바이트생 ‘노밍’이 지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숙박업’이라는 것은 내 삶에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한 때 집의 남은 공간을 빌려주고 수익을 창출하는 ‘에어비앤비’ 등이 부업의 수단으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유행에 동참해 있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받은 전세대출금으로 집을 구하고, 이것도 디자인이랍시고 나름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쁘게 꾸며 놓았다.  부업의 수단으로 전략한 에어비앤비 시장에서 내 숙소들은 꽤나 차별화 되는 공간이었고, 나는 너무나 쉽게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단 하루의 공백기도 없이, 나는 퇴사 후에도 이전의 월급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는 나날을 보냈다. 생각보다 쉬이 벌리는 수입과, 안정적인 나날 –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일을 하지 않고도 ‘숙소’가 알아서 돈을 벌어다 주는 시스템은 꽤나 달콤했다. 나는 더, 더, 더 를 꿈꾸었고, 어느 날 보니 내가 운영하는 숙소가 동시에 네 군데 까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망원동 노란집’이 있다. ‘더 큰 숙소’를 준비하면 ‘더 큰 수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그냥 집을 소품으로 꾸미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구색을 갖춘 공간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막연히 공간을 찾던 차에 이 망원동 노란집이 나타난 것이다.  좋게 이야기하면 망리단길 끝자락,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서도 조금 떨어진 외진 곳. 수익을 극대화하기에는 애매한 구조에 어딘가 석연찮은 집주인. 머리로는 계약하면 안되는 무수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마음은 어느새 지장까지 꾹 찔러놓은 상태었다.
 그리고 정말로 월세 350만원의 공간을 덜컥 계약하는 데까지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되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350이라는 월세의 숫자보다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결실을 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작은 결실을 만들어냈음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았다. 회사를 관두고 부업이나 하며 이래 저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어엿한 사업을 하는 사람임을 여기저기 드러내고 싶었나보다. 나를 그렇게 ‘보여줄’ 공간을 찾기 위해 매번 부동산을 들락날락 했다. 그러다 만난 이전의 망원동 노란집은, 조금 외곽이어도 서울에서 가장 핫한 동네의 단독주택은 왠지 모르게 나를 충분히 잘 쇼잉(showing)할 것 같았다.  그렇게 덜컥 계약한 망원동 노란집은 나의 결실을 증빙해주는 수단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망원동 노란집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규모가 이전의 두배가 되면서 정말 많은 문제들이 생겼는데, 청소가 제일 큰 문제었다. 연말 시즌에는 노밍 한 명으로는 청소가 벅차서 나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 들었는데, 막힌 변기를 손으로 휘저을 때는,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나’하는 회의도 많이 들었다. 청소 도우미를 여럿 불렀다가 누군가가 파투를 내고 오지 않으면, 내가 부리나케 달려간 적도 여럿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만큼 관리가 되질 않으니, 침구에서 나오는 머리카락에 컴플레인도 수차례 받았다.

처음에 상상했던 모습은, 커피를 점잖게 내리는 조용한 숙소 사장님의 느낌이었는데 어느 순간 헐레벌떡 여기 저기 뛰어 다니는, 왠지 모르게 딱한 그런 모습이 되어 있었다.  손님들도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이전에 운영했던 숙소들은 규모가 작았어도, 내가 공간을 꾸며놓은 스타일만 보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대체로 나와 취향과 성향이 비슷했던 터라, 손님과 주인의 입장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오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망원동 노란집은 달랐다. 아무래도 규모가 크다보니 단체 관광객이 많았고, 단체관광객은 공간이나 나를 보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큰 숙소’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 파티에 경찰에 민원이 들어간 적도 있었고, 이웃분과도 몇 번이나 마찰을 빚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나는 노란집과 가장 많은 애정을 쌓아갔다.  사랑과 증오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운영에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지고, 삶의 패턴이 회복되면서 이 공간을 더욱 ‘잘 만들기 위한’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다.


황토색의 벽돌은, 따뜻하고 어여쁜 느낌의 ‘노란집’으로.

무언가 애매했던 집구조는 ‘단체를 위한 독채 숙소’라는 타이틀로.


망원동 노란집이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이 이름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 디자인 사업자 이름에서따온 딱딱하고 아무 의미 없는 이름이었는데, 운영을 하면서 이름을 바꿔나갔다.  공사비를 아끼느라 별다른 투자를 하지 못해 약간 밋밋했던 공간에 ‘노란색’이라는 특성을 부여해주고, 아싸리 단체 여행객들이 신나고, 따뜻하게 놀다가라고 ‘집’이라고 붙여주었다.  


하나 둘씩 방문객의 피드백이 생기고, 내가 그 커다란 공간의 운영이 익숙해지며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나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내가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으로 커가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점차 채워지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가 왔다.

점차 안정화된 망원동 노란집은, 30일 중 예약이 없는 날이 없었고 세 달 앞 서까지 예약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와중에 이 공간을 더욱 더 잘 홍보하고 다져나가기 위해 예약을 막고, 주변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플리마켓을 열 계획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느닷 없이 온 것이다.

2020년 2월의 어느 날로 기억한다. 이전부터 왠 바이러스로 인해 예약 취소 요청을 하는 투숙객들이 종종 있었지만, 일관되게 받아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바로 잠잠해질거라 생각했었고, 이 상승세를 잃지 않고 싶었다. 그런데 이 2020년의 2월 어느 날 – 공표 지침이 내려왔다.

이 코로나라는 세계적인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해, 비행기를 띄우지 말라고. 그리고 모든 여행 관련 업체들은 다 무료로 예약을 취소해주라고. 질문을 해도 답이 없는 예약 플랫폼들과, 무수히 메시지가 쌓여가는 숙박업자 모임 단톡방이 그 순간의 내 당혹스러움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아직 부족해도 잘 크고 있던 노란집 주인에서, 매달 적자만 400씩 내는 ‘겁대가리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여행을 막고, 비행기를 띄우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열심히 쌓아가고 있던 것들이 몇일 새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는 마음은, 대의와는 별개로 쓰라리고 또 억울하고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2020년의 봄이 왔다. 코로나는 잠잠해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고, 숙박객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 나는 망원동 노란집을 휴업하기로 결정했다. 장기 하숙생을 구해서 월세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손실된 재정 상황을 보충하기 위해 정말 다양한 곳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했다. <길을 잃은 나침반의 기분>이 이 때 쓰여진 글이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휴업, 불안함에 이어지는 고강도의 노동. 그리고 그에 반해 밑빠진 독에 물붓듯이 이어지는 크나큰 월세 지출.  길을 잃었다는 말 외에는 달리 수식할 말이 없던 시기 었다.


그 시기에 했던 수많은 고민 중,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단연 ‘망원동 노란집을 언제까지 가지고 갈 것인가’이었다. 보여주기 위해 냉큼 계약했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차갑게 식은 머리로 고민을 해야할 지점에 왔던 것이다. 언제까지고 기다려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릴지, 아니면 이 공간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다른 것에 재투자할지 결정해야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몇 달이고 지연되게 만든 것은, 이 공간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이 공간을 만들면서 다져 나간 애정이었다.  하루는 이 집을 빨리 처분하고 싶다가도, 또 하루는 이 공간을 이렇게 저렇게 다시 운영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마음이 샘솟듯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애증에서 ‘증’이 조금 더 많이 차지해야 할 시기에 되려 ‘애’가 조금 더 많이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이 공간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행히, 정리하고자 마음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 좋은 분께 양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년도 채 안되는 시간에, 나는 나의 첫번째 공간인 망원동 노란집을 보내야만 했다.


정리하는 날 까지 고민이 많았던 만큼, 떠나는 날이 유쾌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망원동 노란집의 책장을 빼곡히 채웠던 나의 작은 소품들을 하나씩 상자에 넣고, 공간 이곳 저곳에 붙여놓은 종이들을 떼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간의 열쇠를 넘겨주고 그 집을 떠났을 떼는 정말 꺼이 꺼이 울었다.  

한참을 울고 조금 진정되었을 때 가족들도 손도, 내 눈물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지 모르는 코로나를 큰 어려움 없이 넘겨냈다는 것, 어쩌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어야 할 상황을 그래도 잘 이겨냈다는 것. 그들은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내 눈물은 그렇게 쉽게 정의될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썩혔어도, 그래도 온 마음을 다 바쳐 준비했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 채 꽃피우지도 못한 것 같은데, 접어버렸다는 것. 무언가를 시도해보지 못한 아쉬움도 남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시도하기엔 너무 두려웠다는 것. 이 모든 마음이 뒤섞인 울음이었다.




이 울음이 마르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요즘 – 망원동 노란집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 조금씩 하고 있다. 그간 코로나로 안부가 궁금해도, 선뜻 질문을 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대신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망원동 노란집 이야기를 듣고 난  반응은 크게 두가지 었다.


얼마전에 만났던 친한 동생은, ‘그래요 – 언니가 망원동 노란집을 한다고 했을 때, 꿈을 너무 빨리 이뤘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했다.

그제 만났던 선배는 ‘그래 살면서 실패도, 시련도 겪는 거지.’ 라고 이야기했다.


 망원동 노란집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는, 누군가가 보기에 ‘내가 꿈을 이룬 이야기’ 였나 보다. 또 어느 지점에는 결국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리한 ‘꿈을 실패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망원동 노란집 이야기>는 꿈을 이룬 이야기도 아니고, 실패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커다란 단독주택에서 소품샵과 조용한 숙소를 운영하는 것은 내 꿈이지만, 망원동 노란집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꿈을 이뤘다기 보다는, 꿈에 다가가는 과정에 있는 무언가었다. 그리고 실패 이야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길거리에 나앉을 만큼 잘못된 것도 하나 없고, 되려 내 두번째, 세번째 공간에는 무엇이 더 필요할지 몸소 체험한 경험이 되었다.


그러니까, 망원동 노란집 이야기는 – 하나의 오답노트에 더 가깝다. 처음 공간을 계약한 순간부터 마지막 정리하는 순간까지 말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할 것을. 내 생활 패턴이 감내할 수 있을 운영방식을 택할 것을. 그리고 정리하는 순간까지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라는 – 그런 오답노트 말이다.  

어느 자기계발서나 창업책에 숱하게 많이 쓰여있는 문구 지만, 나로 하여금 몸소 깨치게 한 그런 값진 경험 말이다.


그리고 여기, 나는 또 두번째 세번째 망원동 노란집을 만들고 있다. 하루는 글로서, 종이라는 매체 나라는 공간을 만들고, 또 하루는 서소문에 위치한 5평의 작업실에서 나의 취향을 가득 담은 소품샵을 꾸려나가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또다시 만들고 있는 5평이라는 공간이 '꿈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고, 시간이 조금 지나 내가 이 공간을 정리하는 순간에는 '포기했다거나 실패했다'고 이야기할 수 도 있겠다.

하지만 이 두번째 세번째 노란집 이야기는 진행형의 무언가이다. 매일 작지만 무거운 걸음을 내딛고, 미약하지만 축적되는 발걸음 속에 내가 그리는 노란집을 더욱 더 구체화시킨다.


공간의 크기가 100평에서 5평으로 줄었을지언정, 그 운영을 하는 마음만큼은 두 배, 세 배 단단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