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브률로프-폼페이 최후의 날 편]
서기 79년, 8월24일. 찬란한 도시가 통째로 화산재에 파묻혔다.
폼페이 사람들은 때마침 불의 신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포룸(forum·광장) 일대에 모여 웃고, 떠들고, 노래를 불렀다. 휴양차 이곳에 온 로마 귀족들은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 baths)에서 따뜻하게 몸을 녹였다. 아이들은 연극과 검투사 경기를 훔쳐보기 위해 난전 일대를 쏘다녔다.
사실 폼페이는 일 년 내내 이런 축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웅장한 신전과 탁 트인 광장, 원형 극장과 드넓은 정원, 대규모의 호화 건물이 가득한 이곳은 늘 활기를 머금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 현재의 행복, 미래의 꿈이 모두 넘실대는 땅이었다. 빛과 이성의 신 아폴로(아폴론)를 모신 이 도시는 실제로 그의 축복을 받는 듯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비극은 고개를 들었다. 이날 정오께 발생한 작은 땅울림이 발단이었다. 모든 것을 떠받치던 땅은 먹으면 안 될 걸 집어삼킨 양 몇 차례 쿨렁였다. 무언가 단단한 게 쩍 갈라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폼페이 사람들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만 돌았을 뿐, 현장은 곧 축제 분위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쁘게 흐르고 있었다.
때마침 정치인 소(小) 플리니우스가 이날 베수비오 화산에서 40㎞가량 떨어진 나폴리만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다니는 것을 봤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재빨리 어머니와 먼 곳으로 도망쳤다.' 플리니우스는 당시 상황을 말과 편지 등 글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그런데, 그것은 거대한 구름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포룸 너머 베수비오 화산이 뿜는 김은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잔기침하듯 거듭 움찔하던 화산 봉우리는 끝내 모든 걸 토해내며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뭉게뭉게 퍼지는 기체는 삽시간에 덩치를 불렸다. 거대한 구름을 넘어 도시 전체를 깔아뭉갤 것처럼 세력을 키웠다. 화산은 끝내 화약 수백개를 한 번에 터트리듯 굉음을 일으켰다. 화산재가 도시 전체에 폭우처럼 쏟아졌다. 쇳물 같은 용암은 썰물 없는 밀물이 돼 맹렬히 흘러내렸다. 비극은 이렇게 전개와 위기 없이 곧장 절정으로 치달았다.
몇몇이 뒤늦게 베수비오 화산을 가리켰다.
이들은 눈앞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몇 시간, 아니 몇십 분 전만 해도 이곳은 인류가 일군 최고의 땅이었다. 인간들 최후의 은신처마저 멸하고 나서야 무너질 것으로 여겨진 도시였다. 그런 폼페이가 한순간에 불지옥이 되고 있었다. "뛰어!"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이때부터 모두가 꿈에서 깬 듯 내달렸다. 재앙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반면 인간은 느려도 너무 느렸다. 빽빽이 내려앉는 화산재가 눈과 코를 찔렀다. 뜨거운 가스가 피부를 태웠고, 날아오는 돌덩이가 뼈와 장기를 휘저었다. 갑자기 포룸의 중앙부가 솟구쳤다. 아폴로 신전과 제국 최고의 목욕탕이 동시에 무너졌다. 최악의 재난 앞에서는 정성껏 섬긴 수호신도, 평생을 갈고 닦은 인간의 기술력도 힘을 쓰지 못했다. 검은 날개를 편 죽음의 신 모르스(타나토스)만이 기세 좋게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난도질했다.
고작 열여덟 시간이었다.
베수비오 화산은 그사이 대륙을 뱉어내듯 엄청난 양의 토사물을 분출했다. 폼페이 전체가 2~3m에 이르는 두꺼운 잿더미에 덮였다. 도시 인구의 10%가량인 2000여명이 함께 깔려 죽었다. 눈부신 문명도 모두 돌과 흙먼지에 파묻히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의 완전한 몰락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힘을 쏟았다. 하지만 신의 심판 같은 참극 앞에서 그 또한 결국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폼페이의 시간은 그렇게 멈췄다. 찬란한 도시의 문명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1827년, 폼페이가 최후의 날을 맞이하고 1800년 가까이 흐른 그해.
스물여덟 살의 러시아 화가 카를 브률로프(Karl Bryullov·1799~1852)가 잊힌 그 도시를 찾았다. 그는 한이 서린 그 땅을 천천히 살펴봤다. 산과 돌, 꽃과 풀 한 포기마저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는 듯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계속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그간 역사에서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등장한 건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 공사를 하던 중 유적과 유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카를로스 3세 때인 1748년에서야 당국이 대대적 조사를 벌였는데, 그때부터 브률로프가 살던 지금까지 발굴이 이어지고 있었다. 브률로프는 이른바 '죽은 이들의 거리'도 걸었다. 헤라클레스의 문에서 빌라 디오메데스에 이르는 1㎞짜리의 이 길목을 둘러봤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가장 많은 이가 죽었다는 일대의 당시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광경이 펼쳐졌을지를 마음속으로 그려봤다. 찢어지는 절규, 어찌할 바를 몰라 터트리는 울음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브률로프는 러시아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유럽에 온 것이었다. 그는 정부 규정에 따라 한 점 이상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그는 이곳을 거닐며 자기가 뭘 그려야 할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과거 그 순간에 펼쳐진 폼페이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브률로프는 폼페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의복과 몸가짐부터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 대한 자료를 긁어모았다. 갖은 유적과 유물도 직접 두 눈으로 관찰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간직한 채 인간 석상이 된 이들의 모습도 수차례 스케치했다. 그는 그림 구상을 위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1483~1520)의 작품 '보르고의 화재', 조반니 파치니의 오페라 '폼페이 최후의 날' 무대 디자인까지 해부하듯 살펴봤다고 한다. 자료 수집부터 작업, 완성까지 걸린 시간은 장장 6년이었다. 그렇게 해 가로 6.51m, 세로 4.56m의 대작을 그릴 수 있었다.
하늘이 번쩍인다.
예고 없이 내리친 벼락에 신상(神像)과 이를 받친 건물 모두 맥없이 무너진다. 천장을 가득 메운 검은 연기는 스스로를 뇌운으로 착각한 양 잿가루를 흩뿌린다. 곧 통째로 폭발할 모양새의 화산은 평생 쌓은 분노를 뿜어낼 듯 불덩이를 토해내고 있다. 아기를 품고 냅다 뛰던 어머니는 날아오는 돌덩이에 머리를 맞고 만다. 그대로 쓰러진다. 즉사였다. 아기를 어머니의 가슴을 붙잡은 채 칭얼대지만, 그렇다고 죽은 어머니가 돌아올 리는 없다. 노란 천을 뒤집어쓴 젊은 부부는 두 아이와 함께 피신하고 있다. 좀 더 큰 녀석은 부모 품에 파묻혀 덜덜 떠는 모습이다. 서로를 둥글게 감싸안은 모녀는 도망치기를 아예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딸들을 다독이고 있다. 품에 안긴 한 아이는 조각나는 신상을 보며 최후의 기도를 올리는 듯하다. 십자가를 목에 건 나그네가 횃불을 든 채 이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들의 맞은편에서는 한 소년과 병사가 움직이기 힘든 노인을 든 채 도망치고 있다.
낑낑대는 소년을 본 병사가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터였다. 폼페이에서 평생을 살았을 노인은 지금도 눈앞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다. 드라마는 그 옆에도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다. 어머니는 자기를 두고 도망치라는 양 아들의 가슴팍을 밀고 있다. 아들은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울먹이지만, 이미 연기를 가득 마신 그녀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한 발짝 뒤 계단 근처도 아수라장이다.
이 와중에도 풍성한 흰 머리의 남성은 반짝이는 물건을 옆구리에 잔뜩 낀 채 눈치를 보고 있다. 계단 위 인파 속 순진한 얼굴의 여성 또한 반짝이는 램프를 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저택 안 보물을 훔쳐 나오는 듯하다. 끝내 탐욕을 버리지 못한 이들에게 재앙은 특별히 더 큰 고통을 주려고 하는 걸까. 문 쪽에 선 사람들의 시선과 자세에서 알 수 있듯, 이 저택 자체가 삽시간에 무너질 게 분명해보인다. 네 발 달린 동물들도 이러한 참사는 당연히 겪어본 적 없다. 근육질의 백마는 누구를 태우고 할 것 없이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전차를 모는 말들 또한 주인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릴 뿐이다.
브률로프는 이 그림의 제목을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브률로프는 베수비오 화산이 터진 그날 '죽은 이들의 거리'에 직접 있었다는 양 자기 모습도 화폭에 함께 그렸다. 그는 자신을 계단 위 화구를 머리에 이고 참극을 지켜보는 사내로 표현했다. 이는 재난을 직접 목격한 듯 생생하게 그렸다는 자신감의 표시기도 했다.
브률로프가 6년간 생을 갈아넣은 보람이 있었다.
언뜻 봐도 역작 느낌이 물씬 나는 '폼페이 최후의 날'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이 그림은 완성 직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였다. 이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작 연극의 하이라이트를 본 양 감격에 젖었다. 그 자존심 센 우피치 미술관도 찬탄을 금치 못했다. 브률로프를 불러 관내 소장용의 또 다른 작품을 정중히 요청할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볼로냐 당국은 브률로프의 개인 작업실에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내줬다. 라파엘로의 작품을 모사(模寫)하고 싶다고 한 그의 요청에 적극 응한 것이었다. 콧대 높은 이탈리아 평론가들 또한 브률로프에게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의 부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1606~1669)의 재림이라는 극찬을 거듭했다. "이건 그림이 아니야. 이런 건 걸작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세." 스코틀랜드 출신의 국민 시인 월터 스콧(Walter Scott·1771~1832)의 평이었다.
전례 없는 영광이 이어졌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그리고 1년 후인 1834년, 브률로프는 이 그림 덕에 프랑스 파리 살롱전(展)에서 금상도 받았다. 러시아 화가로서 처음 누린 영예였다. 1836년, 브률로프는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러시아에 돌아왔다. 그는 국가로부터 표창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다. "베수비오의 목청이 터졌다 / 자욱한 연기가 끓어오르듯 피어 / 불꽃은 전쟁의 깃발처럼 크게 펄럭였다 / 요동치는 대지 위 / 기우뚱하며 뒤흔들린 열주에서 / 우상이 쓰러진다." 러시아의 국민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Alexsandr Pushkin·1799~1837)은 브률로프의 작품에 맞는 시를 손수 지어줬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첫 러시아 화가인 브률로프는 17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브률로프는 화가 출신 아버지에게 그림을 익혔다. 열 살 때 벌써 국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등 남다른 영재성을 보였다. 교육 과정을 진작에 체화한 브률로프는 곧 돈을 받고 친구들 그림을 고쳐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무난히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1822년, 국비를 받고 이탈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브률로프의 눈이 탁 트였다. 모든 게 새로웠다. 당시 러시아는 사실상 미술 불모지였다, 그렇기에 브률로프가 찬란한 르네상스의 추억을 품은 이곳이 주는 감명은 더 깊고 짙었다. 특히 그는 거장 라파엘로의 흔적들을 보고 눈물을 글썽일 만큼 황홀해했다. 브률로프는 이러한 부푼 가슴을 안고 '이탈리아의 아침'을 그렸다. 그를 즐겁게 한 이탈리아의 아침 인상을 옮겨 담았다. 이는 그가 유학 중 처음 그린 그림이었다. 작품 속에서는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올린 해사한 여인이 몸을 살짝 숙이고 있다. 그녀는 두 손 고이 모아 떨어지는 맑은 물을 받고 있다. 가슴 밑까지 옷을 벗어내린 그녀지만, 이 모습이 결코 야하거나 음란해보이질 않는다. 그저 청순하고, 청초하고, 청량하게 느껴질 뿐이다. 브률로프가 이탈리아를 얼마나 청아하게 봤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브률로프의 설렘이 고국까지 닿은 걸까.
그림을 전달받은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와 황후는 이 작품을 마음에 쏙 들어했다. 짝을 맞출 수 있는 결과물이 하나 더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분부를 받아들인 브률로프는 1827년에 '이탈리아의 정오'를 그려 황실로 전했다. 브률로프가 고작 4년 새 러시아 특유의 딱딱한 아카데미 화풍을 떨쳐냈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림이었다. 당시 유럽을 강타한 촉촉한 낭만주의식 화풍에 얼마나 빨리 적응했는지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림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화폭 속 동글한 얼굴, 풍만한 몸매의 여인은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쥔 채 웃고 있다. 두 손으로 물을 받는 앞선 여인보다 한층 더 정겹고, 더욱더 익살맞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동토의 소위 '꼰대'들은 철 지난 아카데미 화풍을 여전히 최고로 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브률로프의 후속작에 분위기가 방정맞다, 기법이 우리네 미적 기준과 맞지 않다는 등의 악평을 하나둘 얹었다. 하지만 브률로프는 틀리지 않았다. 그들이 틀린 것이었다. 이건 브률로프가 얼마 후 '폼페이 최후의 날'을 통해 통쾌히 증명했다.
폼페이의 마지막 순간을 안고 금의환향한 브률로프는 국가 아카데미의 교수로 연단에 올랐다.
브률로프는 가르치는 일도 잘했다. 그는 예비 화가들이 경직된 틀 밖에서 보다 자유롭게 그리기를 바랐다. 브률로프에 대한 인기 또한 대단해서, 그의 강의실은 늘 똘똘한 학생들로 붐볐다고 한다. 브률로프는 러시아로 돌아온 그해부터 1848년까지 12년간 교편을 쥐었다. 그 나름대로는 그 사이 여러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브률로프는 러시아의 일인자 화가로 입지를 굳혔다. '폼페이 최후의 날' 수준의 걸작은 나오지 않았지만, 주문과 의뢰가 끊길 일은 없었다. 치열하게 산 브률로프는 1840년대 후반부터 건강의 급격한 악화를 겪었다. 그는 교수직을 내려놓는 그 해에 '자화상'을 그렸다. 이는 몸이 잠깐 나아진 때 쫓기듯 붓을 들고 그린 사실상 그의 마지막 걸작이었다. 그림 속 브률로프는 지친 채 빨간 소파에 기대있다. 그의 좋지 않은 몸 상태는 쏙 들어간 볼, 튀어나온 핏줄, 생기 없는 검은색 옷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브률로프의 표정만은 살아있다. 특히 눈빛만큼은 상대를 꿰뚫을 듯 강렬하다. 그는 어디 한 판 붙어보자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이를 통해 내면의 열정만큼은 여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보다 따뜻한 곳에서 몸을 돌보세요." 1849년, 브률로프는 의사에게 이러한 권유를 받았다. 한 해라도 더 살고 싶다면 동토를 떠나라는, 사실상 작별 인사 같은 말이었다. 이에 브률로프는 북대서양의 한 섬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결심한 듯 또 짐을 쌌다. 어릴 적 신선한 충격을 준, 젊은 시절 인생을 바꾸게 해준 이탈리아로 다시 몸을 옮겼다. 브률로프는 로마에서 2년을 더 살았다. 그는 1852년, 이 도시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병명은 뇌졸중이었다. 러시아에서 출생한 브률로프는 조국의 도움을 받고 조국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생의 마지막만큼은 자기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든 곳에서 보내고 싶었던 듯하다. 브률로프는 당시 변방이던 러시아의 미술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에도 루벤스나 렘브란트급 화가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전세계에 알린 첫 예술가로 통한다. 이 때문일까. 그는 지금도 그의 조국에서 '위대한 카를'로 칭송받고 있다.
〈참고 자료〉
러시아 미술사, 이진숙, 민음인
러시아 미술사, A. I. 조토프, 동문선
미술관보다 풍부한 러시아 그림 이야기, 김희은, 자유문고
<인스타그램 구경가기>
※브런치서 오셨다고 말해주셔요. 소통할게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