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에티카 4부 전반부를 읽고나서 (2)
<정리 2>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다른 사물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다.
<정리 3> 인간이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는 힘은 한계가 있으며 외부 원인의 힘은 이를 무한히 능가한다.
<정리 4>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기 본성만을 통해서 이해되고 자신이 적합한 원인이 되는 변화 이외의 다른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정리 5> 모든 정념의 힘과 성장 그리고 지속은, 실존을 보존하려는 우리의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비교되는 외부 원인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4부에서 ‘인간의 예속 혹은 감정의 힘에 관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인간의 예속이란, 자연에 예속된 인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나는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고,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주변의 환경에 예속되어있다. 나는 우주에 예속되어 있고, 자연에 예속되어 있고, 사회에 예속되어 있고, 국가에 예속되어 있고, 가족에 예속되어있다. 그리고 나는 과거의 나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러한 측면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으며(정리2), 외부의 원인에 큰 영향을 받고(정리3), 심지어 나를 지배하는 정념까지도 외부원인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정리5) 내가 자기윤리학을 하면서 끊임없이 외부의 상관관계와 나의 자아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도 스피노자의 이러한 생각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자기윤리학을 통해 나의 수동성을 제대로, 면밀하게 직시하고 그러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의 행복을 찾아가는 법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모든 인간과 사물들이 ‘예속되어 있다는 생각’, ‘필연적이라는 생각’, ‘운명이라는 생각’, ‘수동적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는 생각’, ‘결국에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것은 결론적으로 인간의 죽음 또한 필연적이기에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 모든 사유들이 구속되어 있으며, 쓸모없고 부질없다는 허무주의적인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유방식은 동전의 양면 중에서 한 부분만을 보지 못한 사유방식이며, 수많은 가능한 관점 중에서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는 관점에 불과하다. 나는 비록 스피노자의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여기에 헤겔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덧붙이면 매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은 그 내부에 긍정성과 부정성이라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가족은 나에게 슬픔을 주기도 하지만 나에게 기쁨도 준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증진하는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불평등을 늘리는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의 국가는 (예컨대 군대처럼) 나에게 슬픔을 주기도 하지만 (월드컵 16강진출처럼) 나에게 기쁨을 주기도 한다. 자연은 나에게 생물학적 노화의 필연성을 부여함으로써 슬픔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맛있는 음식들, 좋은 공기,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고 제공해줌으로써 기쁨을 준다. 나의 신체는 죽어가지만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우리는 표상하는 방법에 따라 특정한 선이 악이 될 수 있고, 특정한 악도 선이 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이성을 이용해 표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크나큰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크나큰 고통이었다. 그 이유는 표상의 방향이 고통의 방향이 될 수 있고, 또 기쁨의 방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나의 불완전성과 수동성이라는 현실 속에서 내가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1) 내 주변에 나에게 행복을 주는 절대적인 요소를 늘리는 것이고, 고통을 주는 절대적인 요소를 줄이는 것이다.
2) 행복을 표상하려는 경향을 늘리고, 고통을 표상하려는 경향을 줄이는 것이다.
이 중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는 쉽게 하기가 어렵다. 주변의 환경은 보통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바꿀수 있는 환경내지 자연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집중해야하는 방법은 2번, 즉 행복을 표상하려는 경향을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그대로 불완전성과 수동성에 적용을 해보자. 나는 운명에 예속되어 있다. 나의 운명이 어느정도 정해져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나는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선, 나는 운명에 예속되어있지만 그 운명의 끝이 불행한 것일지, 행복할 것인지는 오직 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내가 운명에 예속되어있다는 것은 동시에 내가 운명이라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정적이고 죽어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를 나에게 알려주며,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생명활동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마치 영화관에서 특정한 영화를 관람하는 나와 같다. 그 영화의 결과는 정해져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 영화가 재미있을지 재미없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영화를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다.
어떠한 운명인지도 모르는 특정한 운명에 예속되어 있는 나는 어떠한 태도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제일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칼뱅은 예정설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운명이 기독교적 신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고 과거에 이야기하였다. 즉, 이미 천당 갈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천당을 갈 것이고, 지옥에 갈 사람은 무슨짓을 해도 지옥에 갈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프로테스탄트의 교도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칼뱅에게 묻는다.
이미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정해져있다면, 내가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만약 내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칼뱅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신의 선택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신만이 이를 알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내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우리가 천당에 갈 것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결국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자신이 신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을 하는 방법은, ‘자신의 삶이 축복받았고 자신을 최대한 행복하게 하기 위해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부의 축적을 통한 물질적인 삶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신앙심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나 또한 기독교적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프로테스탄트들의 삶의 태도는 여전히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에 예속되어있다. 우리는 수동적이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운명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운명이라는 굴레의 끝에 나라는 존재가 행복했다는 것, 나의 운명은 결국 행복의 길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자와 운명에 끝에선 나 이외에 나의 운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의 운명이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길은 간단하다.
첫 번째로, 자본주의 체제라는 나를 둘러싼 사회 속에서 물질적인 부를 취득하는 것.
두 번째로, 철학을 계속함으로써 나의 사유를 행복을 표상하는 길로 들어감으로써 사유의 부를 취득하는 것.
나는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를 위주로 나의 운명의 끝에서 내가 행복한 운명을 타고났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