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디트 Apr 13. 2024

가여운 것들(2023) : (상류) 사회에 갇혀 있기에

Compiling 4. 가여운 것들

  변화는 과연 어떻게 일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는 매일 매일 변화하고 있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세포가 죽고 새로 생겨나는 식으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순간마다 변화한다. 아마 십몇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비교컨대 테세우스의 배 문제에 봉착해 있다. 나는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우선 범위를 조금 좁혀서 이렇게 생각해보도록 해야겠다. 우리는 자의로 변화하는 걸까? 아니면 타의로? 쉽지 않은 문제임은 분명하다. 우선 자의의 범위부터가 애매하다. 사회에 귀속에서 어떤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이상 그 질서 속의 자의란 어떻게 보면 타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의라고 단정짓기에는 왠지 나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영화는 적어도 변화를 '타의'라고 정의한 듯하다.  우선 주인공이자 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지는 어린 아이, 벨라 백스터부터가 갓윈이라는 타인에 의해 '변화' 했다. 언뜻 불편함이 느껴지 형태를 취해서.


  불편함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영화에서는 '불편함'이 드는 지점이 중요하다. 우선 생각나는 것만 봐도 벨라의 출생의 비밀에서부터 벨라가 거리낌 없이 갓윈과 맥스를 떠나 던컨과 함께 여행길에 나서는 것, 그리고 욕망(식욕, 성욕 등)을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장면들. 아무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에는 거부감이 든다.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린 사회로 인해 '변화'했고 거기에 적응했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는 거침없이 불편함을 내세워서 질문한다. 여기에 불편해하는 건 선입견, 그러니까 영화의 명칭을 따르자면 '상류 사회' 때문이지 않은가?


    벨라의 출생의 비밀부터 짚어나가보자. 벨라는 자살한 임산부의 시체를 매개로 태어났다. 임산부는 마침 태아를 품고 있었고, 갓윈은 순간의 충동으로 태아의 뇌를 사망한 임산부의 몸에 이식한다. 이 대목에서는 유명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재미있는 점은 태아의 성별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아는 남아인지 여아인지 불명확하다. 하지만 여체 속으로 들어가고, 여성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인식된다. 관찰자의 입장으로 봐도 알아차리기 힘들게, 스무스하게 여성으로 변모하는 그 과정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아할 정도이다. 이성과 과학을 대변하는 남성, 갓윈의 실험으로서 그렇게 벨라는 태어난다. 어떻게 보면 사회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여성의 몸으로 살아간다면 과연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갓윈의 도구로써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갓윈이 결국 부성애를 느끼면서 그저 도구, 대상화의 객체에서 주체성을 갖추게 되며 갓윈을 역습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벨라는 던컨에게 발견되어 함께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게 되는데, 그 던컨은 비혼 남성 사회의 대변인이다. 그야말로 남성이라면 은연중에 품고 있는 모든 욕망을 쉽사리 드러내는데, 이 부분도 불편함에 한 몫 한다. 우리 속 내밀한 것들이 영상화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불편한 일이다. 돈을 하류층 사람들에게 모두 주고 슬픔 속에 갖혀 있는 벨라를 보면서 화를 참지 못하는 던컨의 모습에서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심정을 느끼는 것은 그 역시 나의 내밀한 욕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블레싱턴의 경우 혼인 후의 남성 사회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유욕을 그야말로 불쾌할 정도로 극대화 시켜둔 그 면모는, 혼인제도의 불합리함을 눈 앞, 바로 코 끝까지 들이밀어댄다.


  배경으로 넘어가보자면, 영화의 배경은 마치 벨라처럼, 개새처럼, 기묘하게 접합되어 있어서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아름다운지 불편한지 모를 그 영상미는 '어디 한 번 끝까지 불편해보라'고 작심이라도 한 듯 하다. 미래인지 과거인지 모호한 그 지점. 그것은 먼 과거에서 먼 미래까지 이어져갈 어떤 시스템에 대한 일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벨라의 행보는 결국 갓윈의 직업을 이어받는다. 이성과 과학을 승계받고, 사회에 안착하지만 그 사회는 기존의 사회를 조금 변화시켰다. 벨라라는 혁명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맥스는 벨라를 관찰하고 기록한 혁명의 기록자로 남는다. 혁명이란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가 될 것이다.


  사실 모든 변화는 불편함에서 야기될지도 모른다. 벨라가 타의에 의해 나선 여행을 자의로 끝마쳤듯이, 우리의 불편한 변화도 마침표는 아마 자의로 끝맺음 지어야 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굿 윌 헌팅(1997) : 삶에 정답은 없을지라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