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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디트 May 07. 2024

헤어질 결심(2022) : 클리셰와 반전

Compiling 9. 헤어질 결심

  골조가 없는 채로 건물을 세울 수 있을까?


  관계, 그리고 상황들 역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골조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맥락들을 읽어낸다. 이 상황이라면 의당 그럴 것이라고 믿는 구석들은 관계와 상황의 기초가 되어서 착실하게 형태를 구성해 나간다. 예컨대 소설에서는 클리셰라는 것이 바로 그 골조에 해당할 것이다. 상황과 상황 사이를 적절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그 클리셰가 없다면 소설은 종횡무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맥락으로 우리를 혼란시키기만 할 것이다.


  즉, 적절한 클리셰(골조)는 소설(건물)의 형태를 굳건하게 세워준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어느 등산가가 정상에서 세 번 머리를 박으며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의 맥락은 일목요연하다. 등산가, 기도수는 떨어져 죽었고, 그의 아내 서래는 알리바이가 있다. 만약 소설에서 이런 사건이 등장한다면 독자들은 해당 맥락에서 클리셰를 읽어내겠지. 이 사건은 그저 실족사가 아닐 것이다. 해준의 후배가 따라가는 시각 역시 그렇다. 그건 아마 시청자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준은 클리셰, 골조, 맥락, 즉 프레임을 의심한다. 자부심 있는 경찰이라면 그래야 한다는 듯, 사건의 모든 요소를 착실히 파악해 나간다. 모든 요소를 해부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러니까 산 높은 곳에서 사건을 조망하는 듯한 시선. 그 시선을 의미하는 것은 해준의 인공 눈물이다. 사건을 조망하는 객관적인 시각 이전에 해준은 늘 인공 눈물을 눈에 넣는다. 객관과는 정 반대되는 감정적인 모습이 되는 부분은 재미있는 요소이다.


  해준은 서래를 관찰한다. 관찰은 마치 극중극처럼 이루어진다. 서래가 영화를 보며 잠들듯 해준은 서래를 보며 잠든다. 해준은 서래를, 서래는 해준을 늘 어떤 보조물을 사이에 두고 관찰한다. 쌍안경, 거실창, 자동차 창문, 선글라스 등. 서래의 대사 역시 드라마처럼 '고풍'스럽다. 자해하는 그에게 '독한 것'이라고 했다는 그의 남편의 대사 역시 너무나 고급지고 비현실적이다.


  시청자가 주인공의 마음에 동하듯 해준 역시 천천히 서래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된다. 어느새 인공 눈물을 넣는 것도 잊은 채 서래라는 영화를 관람하기에 여념이 없다. 감정이 절제되어야 하는 경찰에게 들어온 감정은 너무나 포근하다. 해준은 서래의 옆에서만 들숨 날숨을 인식하며 편안한 잠에 들 수 있다.


  주인공의 감정선에 동화한 시청자가 된 해준에게 '반전'이 찾아온 것은 그야말로 클리셰이다. 시청자의 머리를 강하게 때리는 반전이 영화의 묘미이듯, 그 반전 역시 해준의 머리를 강하게 때린다. 해준은 서래에게 늘 '쉽게' 이야기하고자 했었으나, 그 '붕괴'라는 단어만은 해설해주지 않는다. 그는 증거물인 핸드폰과 '붕괴'라는 단어, 그리고 서래를 남기고 서래의 집을 떠나간다.


  두 번째 사건은 '붕괴'한 이후 아내의 일터인 원전이 있는 이포. '새 남편'과 '철썩', 그리고 '서래'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되어서 또 한 번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붕괴한 해준은 더 이상 이전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없다. 그는 시청자가 아닌 극의 등장인물이 되어서 이전, 자신의 후배가 그랬던 것처럼 맥락과 클리셰를 주워섬긴다.


  객관적이었던 그의 모습을 끊임없이 음성으로 복기해 왔던 서래에게는 그런 전형적인 모습의 해준이 충격이었으리라. 그는 해준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이미 그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미 붕괴되어 버린 해준의 입에서는 클리셰 그대로의 것이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해준은 서래와 함께 한 자동차 안에서 죽은 듯이 잠든다. 붕괴 이전처럼. 이 영화의 포스터가 바로 그 장면인데, 마치 산과 바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일몰이 함께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래는 자신의 산이라는 호미산으로 해준과 함께 가서 자신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뼛가루를 뿌린다. 첫 번째 사건 속에서 서래는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어질지 않아서 산에 가기 싫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번째 사건 속에서는 적극적으로 산에 오른다. 분명 산이었을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뿌리고, 산임이 분명한 해준을 독대한다. 머리 위 라이트로 마치 취조하듯 해준을 비추면서 '자신을 피의자로 대해달라'고 요구한다. 객관적인 시각, 자부심 있는 경찰, 붕괴되기 전의 산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이전 사건의 유일한 증거인 핸드폰을 돌려주며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한다.(이 산에서도 깨알같이 해준을 밀어버릴 듯한 분위기를 잡아서 반전을 집어넣는다. 여러모로 '반전'이라는 요소를 즐겁게 사용했다. 마치 일몰 후의 밀물이 서래가 만들어놓은 작은 산을 바다로 만들어버리듯.)


  영화의 마지막. 해준은 서래의 자동차 앞에서 '인공 눈물'을 삽입하고 시야를 객관적으로 정돈한다. 사건의 정황을 찾고 천천히 탐색한다. 영화를 관람하듯 느긋하다. 실제 현장이라면 서래의 핸드폰 속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틈도 없이 서래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붕괴된 채였다면 아마 그랬을 테지. 그러면 서래는 더 일찍 발견되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준은 음성 파일을 듣는다. '부서지고 깨어짐' 속에서 서래가 말했던 해준의 사랑한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다. 객관적으로 사건을 조망하여 도달한 정답을 감정적으로 버려 버리는 말. 서래와 해준이 결합된 순간.


  서래는 해준의 말처럼 자신의 몸을 바닷속 깊은 곳으로 빠뜨린다. 미결 사건이 되어 계속해서 자신의 사진을 바라볼 해준의 모습을 상상하며 극에서 퇴장한다.


  지혜로 사건들을 이끌고 파괴하고 퇴장한 서래는 그야말로 바다였고, 그 바다에 감정이 동한 어진 자, 해준은 그야말로 산이었다. 해준은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며 극을 퇴장하는 서래와 달리 극의 등장인물로도, 극의 관찰자로도 온전히 남아 퇴장한 서래를 끊임없이 찾는다. 그리고 그 뒤로 서래가 양동이로 퍼서 만든 작은 산이 파도에 휩쓸려 하나가 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사랑', 깊은 바다에 버려버리고자 하는 '헤어질 결심' 일 것이다.


뱀발.  글을 닫기 전, '원전 완전 안전'하다고 했던 해준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안전한 원전'과 '완전한 먹거리에 대한 집착'이 좀 절묘하지 않은가 싶은데 이는 의도일까? 여하튼. '완전히 안전한 원전'처럼 '부부 관계' 역시 완전히 안전해야 했을 텐데, 그 관계는 마치 클리셰처럼 서래라는 반전에 깨지고 말았다. 떠나는 와중에도 '이혼한 남성'과 '석류', '자라' 등 맥락을 가득 챙겨가는 것이 재미있는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뱀발 2. 서래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 전, 바닷가에 꼿꼿이 서 있던 나뭇가지를 내팽개친다.(그렇다. 글의 대표 이미지로 삼은 위의 그 장면이다.) 너무 영화적인 장치를 직접적으로 표현해서 서래가 해준이 관찰해 온 '극의 등장인물'임을 대놓고 암시하는 것이 재미있는 지점. 긴장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를 할 수 있는 자신을 내팽개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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