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주로 혼자 놀았다. 왜냐하면 이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이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일까. 내가 살았던 집은 시골에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사방이 논이었다. 그곳에서 어린아이 걸음으로 이십 분 정도 비포장길을 걸으면 집이 나왔다. 오른편에 산을 끼고 양계장을 지나서 한참을 걸어가면 가축 냄새가 덜 나는 곳이 나왔는데, 거기서부터는 산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당연히 경사도 가파르게 변했다. 동시에 길이 조금씩 좁아지면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이 과수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과수원의 초입에 집이 있었다. 경운기 바퀴가 닿는 곳을 제외하고는 무릎 높이만큼 잡초가 자라곤 했던 길이었다. 그 소로를 조금 걸어가면, 오래된 집이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할아버지 집, 그 집에서 나는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살았다. 당시에는 이촌향도가 유행이었다. 상속권이 있는 장자를 제외한 다른 자식들은 각자의 살길을 찾아서 도시를 떠나는 경우가 흔했던 시절이었다. 해서 내가 살았던 그 고장도 젊은 부부가 없었고, 아이도 없었다.
그래도 마당도 있고, 한쪽에는 소도 한 마리 있었다. 깊은 그늘이 있는 대청마루에, 세 개의 방, 흙바닥으로 된 아궁이로 밥을 짓는 부엌도 있었다. 거기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갓 태어난 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녹색이 떠오른다. 아래에서 돋아나는 이름 모를 풀들과 위에서 하늘을 덮어주던 감나무의 잎사귀가 떠오른다.
제초제를 뿌려도 풀은 잠시 쉴 뿐이지 계속 돋아났다. 해서 녹색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장벽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아래에서 위에서도 계속 내려오고 횡으로도 겹겹이 쌓여있는 장벽 같은 느낌이었다. 여름과 가을은 감히 그 녹색의 영역으로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리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 무언가 기어 다니는 생명의 움직임 같은 것이 늘 있었다. 개구리, 오소리, 삵, 뱀 이런 것들이 수풀에서 숨어서 그들의 세계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옛날이었고 집안 어른들도 남자가 아기를 돌보는 것을 터부시 했었다. 해서 아버지는 그들의 눈을 피해서 밤 중에는 갓 태어난 동생을 안고 과수원을 걸어 다니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모사에 물렸다. 아버지는 풀숲에서 동생을 안은 채 쓰러지지 못하고 어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지금처럼 “한이 엄마” 하고 불렀을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입으로 상처를 빨아 피를 뽑았다. 그런 와중에 혹시 입에 있을 상처를 떠올렸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성정에 울지도 못했을 것 같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입고 있던 옷을 찢어서 종아리를 단단히 묶었고 아버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정말이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해서, 어린 나에게 봄, 여름, 가을은 그렇게 조금씩 두려운 계절이었다. 어린 눈에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노동이 눈에 보였다. 잡초를 뽑고, 거름을 데고, 논둑을 북돋고, 농약을 뿌리고, 그것의 반복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나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늘 걱정이 되었다.
그나마 농번기의 주말에는 종종 친척들이 와서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의 형제가 농사일을 거들러 오는 날에는 사촌들이 평소에 못 먹는 과자를 가지고 왔었다. 그들이 가지고 오는 특별한 장난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 자체가 나에게는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연결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적막하더라도 겨울이 더 좋았다.
수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아래의 잡초가 사라지면 나는 감나무를 우주선이라고 생각하고 타고 놀았다. 높은 나무에 앉아서 가지를 조종간이라고 생각했다. 가지치기한 곧은 가지를 주워서 칼이라고 상상하기도 했었다. 때때로 거대한 나무는 외계 괴물이었고, 나는 로봇이 되기도 했었다. 나는 메칸더 V가 되어서 나무와 칼싸움을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했었다. 아니면, 넓은 과수원을 산짐승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나는 꿩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조금은 날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계절을 네 번 보냈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나도 이제 학교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울산에서 제일 큰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었던 아버지는 너무 오래 일을 쉬어서 일자리를 잡는 것이 어려웠다. 해서 우리 가족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처음에는 부산의 삼락동에 정착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건설 현장이 많이 생기던 창원으로 다시 이사했다. 창원 안에서 형편이 되는 만큼 조금씩 평수를 넓혀가면서 몇 번인가 이사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일 학년이 되던 해, 전세살이가 끝났다.
그러는 동안 할아버지가 소천했다. 과수원은 장자의 몫이 되었고, 지금은 큰아버지가 과수원의 일부를 운영하고 있다. 산도 칼로 자른 없어졌다. 내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녹색의 일부는 사촌 형이 운영하는 세차장이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도로에 편입이 되기도 했다. 논이 있던 곳에는 커다란 카페가 생겼고, 대형 마트도 생겼다. 저수지가 있던 곳은 브랜드 아파트가 들었다. 예전과 비슷한 것은 밤하늘 빼고는 아무것도 없게 되어버렸다.
명절 때마다 큰집에 가지만, 그때와 지금은 너무 변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두려웠던 녹색과 그것을 키우는 뜨거운 햇살과 대청의 그늘에 앉아서 미안한 마음으로 부모를 기다렸던 순간들만 섬뜩하게 떠올릴 뿐이다.
어느덧 두 딸을 키우고 있는 내가 여기에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아파트 빚을 갚아가면서 하루하루 어쩌면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요즘은 집이 투자 대상이 되었고, 어찌하였든 서울에 뿌리를 내리거나 아니면 센스 있게 이사를 하는 것이 유행이 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장자만 시골에 남는 시대에 넷째 아들이면서 멀쩡한 직장을 버리고 귀향했던 아버지처럼 유행하는 것은 잘 안 하는 편이다.
다만, 두 딸을 자세히 지켜보려고 하는 편이다. 바라보고 대신 기억해주고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나는 자영업자이지만 주말은 찰떡같이 쉬고, 대신 놀이터나 롤러장에 찰떡같이 붙어 있는 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두 딸이 원하는 날까지 그렇게 할 생각이다.
서우와 온이가 보이는 곳에 앉아 있는다. 음지든 양지든 그곳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그러다 눈이 침침하면 하늘을 본다. 물을 달라하면 가방에서 꺼내어 주거나, 아이스크림을 사준다. 때때로 피곤하면 입을 벌리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의 의무처럼 느껴진다.
두 딸이 나의 이런 마음을 얼마나 알아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끔 남기는 글이 조금씩 쌓여서 그들이 힘들 때 작은 보호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와 동시에 앉아 있지만, 예전처럼 싸우기도 한다. 각박해지려는 욕심과 싸우기도 하고, 뭔가 자극적인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싸우기도 하고, 나의 미련한 선택으로 인해 두 딸이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쓰는 데 며칠이 걸렸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이야기라서 그렇지 싶다. 어쩌면 그 시절 읽은 동화책의 내용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지 싶다. 이 글을 하늘나라에 있을 할아버지가 읽는다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할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앞에 쓴 대부분의 끝 문장을 ‘~했을 것이다.’라고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이고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미지 녹색의 장벽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눈을 감으면 생각난다. 종종 새참을 들고 가는 할머니 뒤를 따라 녹색의 세상 안으로 들어간 적도 있었다. 막상 도착한 그곳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무서운 생명체도 없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모으고 아빠 엄마라 부르면 어느새 두 사람이 땀에 젖은 채 나타났다. 그런 부름에 응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년 시절은 나에게 거름 같은 시간이다. 세월 속에서 부식되었지만, 지금까지의 나를 존재하게 한 유효한 영양분이다. 종종 놀이터에서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두 딸의 모습 속에서 넓은 과수원을 뛰어다니는 내가 겹쳐 보인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두 딸의 입술을 보면 매일 새벽 인력 시장을 나가던 아버지가 의지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우리 두 형제를 아꼈고, 세상의 흐름과 다른 그런 선택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이런 글이 때때로 백지에서 돋아난다. 삶의 생채기가 생긴 곳은 공허할지라도, 가운데에는 잡초 같은 글이 가끔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