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의 여행은 어떤가요
데이빗은 내 모자를 보고 말을 걸었다.
-음. 이 장소에 적당한 모자를 썼구나.
혼자 바에 가는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도시명이 적힌 모자를 쓰면 되겠다. 바 어딘가에는 그 도시를 아는 사람이 반드시 있으며 대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 흰 티셔츠 위에 보드라운 체크무늬 셔츠를 걸치고 백발에 가까운 단발머리가 잘 어울린다. “그러니까 혹시..뮤지션이야..?” 라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지만 내 질문에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오늘 무대는 콘트라베이스와 섹소폰이다. 데이빗은 콘트라베이스와 오랜 친구인데 늘 함께하던 섹소폰 연주자가 코로나에 걸려 오늘 저 섹소폰과는 처음으로 맞춰보는거라 친구가 긴장을 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내가 참 좋아하는 무대 뒤 이야기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데이빗은 머리를 앞으로 뒤로 끄덕거렸고 나는 그만 두번째 곡에서는 울컥해버렸네. “잘 모르지만 둘의 호흡도 참 좋지 않았니?”라고 묻자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웰..그러니까 아주 좋았어..내 친구 마크는 원래도 훌륭한 연주자고 나는 그의 연주를 수백번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오늘이 손에 꼽게 좋았어. 아무래도 그 이유는 전 타임에 연주한 저 여자 콘트라베이스 때문인거 같아. 뉴욕 출신이 아닌 젊은 여자 연주자였는데 아주 잘했었거든. 진짜 훌륭한 연주였어. 그래서 마크가 오늘 자극을 받은 거 같아. 뉴욕의 재즈를 보여주자 뭐 그런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 타지역 출신의 젊은 뮤지션에서 자극을 받아 본인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시니어 뮤지션의 이야기. 맥주를 마시며 데이빗이 물었다. 뉴욕에서는 뭘 했니? 메스칼이 들어간 칵테일을 마시며 내가 답했다.
-음..슬립 노 모어를 봤어
-아..그게 아직도 하니..?
-아, 그게 오래된 거야..?
-음..내 친구가 그 초연부터 거기서 연기를 했어서 나는 초연을 봤었는데..2007년 정도부터 했을걸..?
-아..아직도 엄청 인기야
-그렇구나..그거 참 재밌지. 나는 그냥 보러갔다가 내 친구가 갑자기 토플리스를 하고 춤을 춰서 놀았었어
-그 장면..! 진짜 좋았어. 되게 강렬하더라. 근데 뉴요커도 토플리스에 놀라니..?
-웰..
뮤지엄은 안갔냐 묻길래 모마에 갔었는데 사람이 생각보다 없어서 너무 쾌적하고 좋았다 말했더니 그건 코로나 때문이라 그렇지 모마는 늘 붐빈다고 말했다.
-내가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모마에서 가드로 일했더랬지. 당시 내 여자친구의 삼촌이 모마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라
나를 거기에 넣어줬는데 매일 미술관이 끝나고 텅빈 공간에서 그 그림들을 본 것이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어.
나는 느릿하고 물흐르듯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술을 홀짝이며 맛있는 안주를 먹듯 들었다. 젊은 시절 브루클린에와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모마에서 일을 하고 아티스트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의 공연을 보러 다니고 그런 것이구나. 되게 폼나는 이력을 쌓는 것이구나. 데이빗이 내가 하는 일을 물었다.
-나는 광고회사에서 일하고 글도 써
-무슨 글을 쓰니? 나는 북 에디터야
-어머나. 에세이인데 여행과 일과 그리고..퇴근 후의 즐거움..뭐 그런거랄까..
-퇴근 후의 즐거움이라면 광고인의 로맨스 그런 거겠구나
-그게 좀 다른데..어드벤처랄까…?
-제목이 뭐니
-아.. 오늘의 모험..
-그렇다면 내일은..?
나는 오늘의 모험을 말했는데 그렇다면 내일은? 이라고 자연스럽게 묻는 북 에디터 앞에서 깔깔대고 웃었다.
-지금은 어떤 책을 편집하고 있어?
-흠..(인상을 쓴다) 흠..(한숨을 쉰다) 나는 주로 아카데믹 북을 편집하는데, 이 책은 레바논 출신의 여자가 인류학에 대해 말하는 책이야. 흥미로운 주제긴 한데..중반부로 갈수록 흠..톨쳐..톨쳐 뜻 아니..? 진짜 톨쳐..
데이빗의 표정만 봐도 톨쳐의 뜻이 뭔지 알수 있었고 그는 이 톨쳐 때문에 많이 빡쳐보였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어졌다. 데이빗은 아주 좋은 스토리텔러로서, 주제에서 주제로 또 다른 주제로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자신의 인생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갔다.
데이빗은 박사학위를 윌리엄 워즈워스로 받았다고 했다. 그러니까..윌리엄 워즈워스라면 나도 문학 교과서 어딘가에서 들어본 이름인데..고향은 미네소타인데 내일 어머니날을 맞이해서 여동생 부부와 함께 미네소타에 간다며 또 한번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나도 안다. 나는 물론 가족을 사랑하지만..으로 시작되는 대화가 어디로 가는지ㅋㅋ쓰고 있는 폰은 1G인데 이번 9월에 미국에서는 1G서비스가 중단되어서 그 다음에는 휴대폰을 없앨까 싶다며 빨간색 지우개만한 폴더폰을 꺼내서 켰다.
-스투핏 폰..
-우리가 이제 폰을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거 혹시 아니?
-스투핏 스마트 폰..
비워진 물잔을 채워주고 내 물잔을 채웠더니
-오..! 내가 채워줬어야 했는데…! 이런 Uncivilized person이라 미안..
하지만 별로 미안한거 같지는 않았다.
다음에 뉴욕에 오면 연락하라며 yahoo 메일을 알려준 데이빗.. 야후가 먼저 망할지 내가 먼저 뉴욕에 갈지 모르겠지만 나는 브루클린에 다시 온다면 데이빗을 만나고 싶다. 나의 도시를 살아가며 이토록 세련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