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aster Kay Feb 05. 2016

의지를 믿슙니까?

어쩌다보니 분에 넘치는 운을 타고 난 저인지라, 가끔 꼬꼬마 개발자들에게 조언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곤 합니다. 한편으로는 제 한몸 수습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누굴 밀고 당긴다는건지 스스로 한심하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현실감각이 떨어질 정도로 쩌는 개발자보다는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사고 잘 치는 저같은 인물이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의지를 갖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주니어가 많습니다. 아니, 많다기보단 거의 모두가 그렇다는 표현이 적당합니다. 그럼 제가 되물어 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하죠?'


기실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 진행중인 프로젝트가 바빠서/술친구가 많아서/얼마 전에 연애를 시작해서 지금 당장은 못 하고 있거나, 하지도 않는 공부에 몇 시간씩 투자를 하고 있다고 뻥을 치거나죠. 예외도 있지 않겠냐구요? 그런 애들은 저 따위가 함부로 조언을 던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이건 주니어의 잘못이 아닙니다. 평생 닥달 오리엔티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자기주도적인 활동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럴 땐 대한민국의 교육 체계를 까야죠.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큰 착각을 하나 안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은 학창 시절이 기억나시나요? 그러면 개념원리나 정석같은 책도 기억나시겠죠. 네, '집합과 명제'만 죽어라 파서 새까매지는 바로 그 책 말입니다.

불행히도, 의지는 힘/민/체/지같은 스탯이 아닙니다. HP나 MP같은 자원이에요. 그게 어디서 무한히 퐁퐁 솟을 줄 알고 의지 드립을 칩니까? 내 의지가 딱 집합과 명제까지밖에 안 되는데요 :-P


물론 의지 총량을 늘이는 트레이닝을 통해 좀 더 오래 집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자원일 뿐입니다. 의지를 단련하는 훈련보다는, 의지가 다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의지와 동기를 거의 비슷한 개념으로 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거기에 산이 있어야 오를 의지도 생겨난다는 뜻이지요. 제 생각이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1. 문제를 재설정하세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려 봅시다. 조슈아가 '그래! 나는 반드시 여기서 탈출해 살아남을거야!'라고 마음먹었나요? 아니죠! 그는 아빠 귀도의 구라에 넘어가 수용소를 바라보는 프레임이 '체험, 퀘스트의 현장'으로 재정의되었죠. 그래서 살아남았던 겁니다. 만약 어린 조슈아가 막무가내로 의지만 불태웠다면, 그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연 대신 '쉰들러 리스트'의 조연이 됐을 겁니다. 물론 빨간 옷입고 죽는 역할로요.

하고자 하는 일의 과정을 재설계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즐기세요. 저는 가능한한 매일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적어도 나흘째인 오늘까지는 지키고 있네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최대한 많은 생각의 조각들을 서랍에 담아두고, 떨어지지 않게 남겨둔 뒤 하나씩 다듬어 내보내는 거죠. 일부러 긴 글을 적지도 않습니다. 저에겐 브런치가 '하루에 글 하나를 끄적여 올리면 되는' 모바일 게임일 뿐입니다(물론 최종 교정은 PC로 합니다). 깃헙의 대쉬 보드에 자신의 연속 푸쉬 일수가 나오는 것도 같은 원리의 UX입니다. 그 스트라이크를 끊기 싫어 한 줄이라도 코딩해서 올리게 되는 거죠. 나중에는 스스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잰걸음을 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2. 셈을 하세요. 나누세요.

요즘 뜨는 새 언어를 배워 보려 한다 칩시다. 서점에서 책도 구입했습니다. 이제 공부를 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잠깐, 여태까지 내 인생에 작심삼일이 몇 개나 됐는데 이번만은 예외일 거라 확신하는 거죠? 미친 거 아닌가요?

우선 책 페이지 수를 봅시다. 여러분이 한달 내로 책을 떼고 싶다면, 페이지 수를 30으로 나눕니다. 주말에 쉬고 싶다면 20으로 나누시구요. 그게 여러분이 하루에 읽어야 할 분량입니다. 포기하는 패턴은 의외로 뻔합니다. 첫 날에 페이지를 왕창 넘긴 다음 내일은 하루종일 페북질을 하는 거죠 :)


3. 자학금지

다시 학창 시절을 떠올려봅시다. 참고서를 밑줄로 새까맣게 도배하거나 단어를 외운 뒤 사전을 찢어 씹어먹어버리는 클리셰같은 친구를 한둘 정도는 보셨을 겁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성적이 좋았나요? 아마 아닐 거라고 예상합니다.

사실 학습 과정이 고통스러울수록 기억에 오래 각인된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로 보입니다. 실제로 프레젠테이션의 폰트의 가독성이 떨어질수록 청중이 내용을 더 잘 기억하더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극약 처방일 뿐, 지속 가능한 요법이 아닙니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오늘의 과정이 즐거워야 내일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개념 하나를 익히는데 한나절이 걸린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스로 익히느니 백 번 물어서 배우는 게 낫습니다. 가치를 계산할 때는 반드시 총 효용을 비용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일년 걸려 천만원을 버는 사람보다 30분만에 만원을 버는 사람이 낫죠.


4. 절망금지

사람의 일생은 모든 하루를 뿌듯함으로만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때로는 컨디션이 나쁘거나 급한 연락이 왔거나 우연히 본 웹툰이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정주행을 하느라 오늘의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따위 걸림돌 하나 때문에 과업을 완전히 놓으면, 그건 진짜 실패한 겁니다.

앞서 책 읽기를 언급하였는데, 어쩌다 하루를 건너뛰었다고 합시다. 하지만 어때요? 애시당초 책에는 목차나 저자 소개, 별첨이나 색인 따위가 있습니다. 그 페이지도 다 포함해서 셈했으니 하루나 이틀 정도는 벌었군요. 어이쿠, 그런데 하루를 더 놀았다구요? 괜찮습니다. 한 달이 한달 하루로 바뀌었을 뿐이군요. 너무 정교한 계획은 뒷날 포기를 위한 좋은 핑계거리가 됩니다.


5. 작은 성공을 하세요.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땐, 기막힌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시시한 문제에만 도전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국대 축구팀이 처음 소집되면 승수 쌓기 동남아 투어를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어떤 일을 완수한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기술 서적을 한 번도 완독한 경험이 없다면, 가능한한 엄청나게 얇은 책을 구입해 보세요. 전 보통 포켓 레퍼런스 같은 걸로 시작합니다. 전 MFC나 스프링을 거의 할 줄 모르는데, 하필 샀던 책들이 하나같이 라면받침이나 베개로 쓰기에도 부담스러운 두께였습니다(물론 MFC나 스프링 관련 서적 대개가 그렇다는 건 함정입니다). 반면 PHP는 단 반나절만에 익혀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속독을 하면 20분만에도 읽힐 만큼 별 거 없고 시시할뿐더러 심지어는 오타도 수두룩한, 쓰레기같은 책을 선택했습니다.


'육체는 단명하나 근성은 영원한 것'

김성모 화백의 말입니다. 하지만 실은 근성이 육체보다 단명합니다. 의지의 유한함을 인정하시고, 알고 보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처지라는 점에 위로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이 지나면 민족의 명절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설 연휴가 끝나면 정신차리고 뭐라도 해야겠다구요? 좀 전까지 이 글을 읽고도 정신을 못 차리셨군요! 무릇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오늘 당장 시작하시고 설 연휴는 신나게 노시기 바랍니다 :)




작가의 이전글 러버덕: 강제적 객관 주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