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사실 한국에서는 근대화를 경제성장과 동일시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성공적인 또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근거해 한국은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그러나 다음과 같은 역방향의 질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 한국에서는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정치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는가? 왜 한국에서는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자유도 제대로 향유할 수 없는가? 왜 ..."
사회학자 김덕영의 <환원근대>는 압축성장이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하는 책이다.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해 언급은 최대한 삼가야겠으나, 그가 설정하고 있는 문제의식 만큼은 인용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은연 중에 '한강의 기적'으로 한국 사회의 근대화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한국 사회는 기형적 근대화의 결과 점차 심하게 앓고 있다. 경제적 근대화 수준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근대화 수준의 불일치가 낳은 사회적 불안정은 심화되고 있다. 김희경은 김덕영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그 생략된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로 '정상가족'과 '근대적 개인'을 지목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는 근대화의 진행과 함께 사회 안전망을 점차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그에 따라 시민사회와 공적 영역이 확대 되었으며 가족과 개인의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자리잡았다. 반면 한국 사회의 경우 서구 근대화의 반의 반만큼도 안되는 시간 동안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사회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당사자가 충분히 인식되고 공론화 시키기까지의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뜻이다. "잘 살아 보세"라는 시대적 민족적 사명은 애초에 그런 논의를 허용하지도 않았다. 외화되지 못한 불만은 모순적인 관습으로 누적되었고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과잉핵가족주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마땅히 공공 영역이 기능했어야 할 부분마저 가족의 책임으로 전가된 형태였다.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저성장 시대 가족안전망이 사회안전망을 그나마 대체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가족시스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승인하면서 국가가 가족에게 사회적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사회적 안전망은 구축되지 않게 되고 가족을 떠난 개인이 살 수 있는 곳이 없다. 대표적으로 미혼모다. 미혼모에게는 사실상 경제적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재산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사회적 지지도 받지 못하니 사실상 독립은 불가능에 가깝다. 버지니아 울프가 20세기 초 쯤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에게 재산권이 없다고 적고 있다. 다행히도 자신은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다고도 적었다. 미혼모들은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가족의 기능이 비대해질 수록 개인의 존재감은 축소된다. 결혼은 가문의 결합으로 뭉뚱그려지고, 출산은 생산주의적 인구론으로 뭉뚱그려진다. 아이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부모의 소유물이 되고 생존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독립적 개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 아이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는 '비정상가족'은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한다. 사회는 한편으로 그런 '비정상가족'들의 불구화를 방조하기도 한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이렇게 엄청난 기능을 수행하는 가족을 꾸리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그리고 사회는 그 비용을 모두 당사자(혹은 가족)가 부담하도록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위하여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기성세대의 당위는 그저 모호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등 책임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윤리적 포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자연은 가능하게 하고 문화는 금지한다"고 말했다. 아마 동성애자로서 느낀 바가 있었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회적인 차별을 겪어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이젠 개인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다. 현실이 변화하면 사회적 인식과 물적 토대도 함께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이상한 정상가족>은 '국가주의적 개인주의'라는 형용모순적 표현을 언급한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위해 가족이, 가족의 변화를 위해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주의적 개인주의는 가족 바깥에서도 개인이 살아 숨쉴 수 있도록 공공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혼, 출산, 육아, 여성의 경력단절 등이 정말 사회적 문제라면 사회가 나서서 인센티브 구조를 재설계 하는 등 해결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를 과감히 꿈꿀 수 있는 유연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그렇지 못한 곳에 비해 덜 폭력적이고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