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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02. 2019

고등래퍼3 이영지 우승, 그리고 생각해볼 거리들


사실 이제는 무대 영상 클립을 보는 것도 조금 지겹게 느껴지던 고등래퍼 시즌3가 대장정의 막을 내렸고 우승자는 이영지라고 한다. 이영지 외에 이름을 아는 참가자는 양승호, 릴타치(본명 모름), 하선호, 언텔(본명), 지스트(모름) 정도인데 예선은 별로 관심이 없었고 본선 무대부터 클립 조금 본 거 같다. 그 중 좋았던 곡들 뽑아볼라고 음원 다시 보는데 왤케 많냐. 기분 탓인가;


- 최진호(블루웨일), 내 맘대로(Feat. 기리보이, 펀치넬로)

- 이영지, GO HIGH(Feat. 우원재, 창모)

- 김민규(영케이), HERE(Feat. 빈첸)

- 강호진(릴타치) & 김호진(호치키스), 눈

- 김민규 & 윤현선(지스트), 별 헤는 밤

- 강현준 & 최진호, 카모플라쥬(Feat. 키드밀리)

- 양승호, U.F.O(Feat.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 이진우($IGA A), 입에 마스크(Feat. 행주, 웹스터 비)


개인적으로 베스트는 '카모플라쥬'였고 특히 릴타치는 이미 독립적으로 뭔가를 할 준비가 된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느낌이 왔다. 그 다음 티어로는 영케이나 블루웨일 정도. 하선호는 원래 싫었고 이영지도 역시 별로였지만 마지막 무대만큼은 깜짝 놀랄 정도로 좋았다. 내가 두 여성래퍼 친구들에게 점수를 짜게 주는 것은 캐릭터 부재의 문제 때문이다. 랩을 열심히 잘 하는 것 외에 어떤 색깔과 어떤 소재들로 세계관을 짤 것인가. 그건 쉽지 않은 문제고 기성래퍼들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많긴 하지만 어쨌든 고랩 이후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 한다. 베이식과 소울다이브가 쇼미더머니 우승에도 불구하고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보고. 나머지 친구들 역시 잘 하긴 했는데 자기가 구현하고자 하는 컨셉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 것 같다는 인상에 그쳤다. 특히 양승호. 퍼포먼스가 좋았기에 더욱 아쉬웠다.


제목에 맞게 이영지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사실 이영지의 우승이 주목받는데는 '혼성 힙합 서바이벌 최초의 여성 우승자'라는 타이틀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염원으로서 투표에 반영됐다. 랩 퍼포먼스 적으로 그만큼 압도적이라고 보기 힘든 이영지가 파이널 무대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또 다른 우승후보였던 양승호의 최종 득표수를 넘는 320표를 득표(누군가는 이를 인기투표라는 단어로 설명하겠지만)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겨놓고 시작하는 결승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김하온을 연상시키는데, 이러한 압도적 득표는 단순히 랩 퍼포먼스 적인 차원에서 구별될 수 없는 어떤 이유를 암시한다. 무엇보다도 이영지의 우승에서 "여자가 해냈다"며 감격을 느끼는 절대 다수의 여성 시청자들의 반응은 결정적이다. 나는 여성들이 기존의 알탕 힙합에 지쳐있다는 전제 하에 '이영지와 그 전 시즌의 우승자 김하온이 여성픽이다'라는 가설을 세워보려고 한다.


김하온이 여성픽인 이유는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대강 '순수하고 귀여워', '고딩인데 철들었어', '심지어 잘해', '가사도 착해'의 조합 정도?)고 보고, 이영지에 대해서는 김혜리 기자가 여성들의 액션 영화 감상법에 대해 썼던 글을 입구 삼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시네마>에서 썼던 대로, 액션 장르영화를 보러 간 여성 관객은 젠더 정체성을 잠시 잊고 남성 주/조연 캐릭터에 상상으로 동일시해야 영화의 쾌감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다. 흥미진진한 갈등과 근사한 활약은 모조리 남성 인물의 몫이고 여성 캐릭터들은 이야기 주변부로 밀려나 필요할 때 ‘계기’로 동원되거나 해결돼야 할 ‘문제’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모욕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액션영화를 싫어한다. 액션 연출은 더군다나 못한다”는 통념은 뒤집어볼 필요가 있다. 여성 관객이 액션 장르를 덜 선호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까닭은 과연 태생적으로 폭력을 못 견디는 여린 평화주의자라서일까? 혹시 영화를 보는 동안 그녀들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투사하고 몰입할 만한 동일한 젠더의 캐릭터가 스크린에 부재하고 부족해서는 아닐까?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레볼루셔너리 로드 <매드맥스> 부분, 씨네21


인용한 대목의 논의에 따르면 남성들이 액션 영화의 주체로 등장하는 만큼 남성 관객들은 서사 속에 자신을 손쉽게 일치시키는 반면, 여성 관객들은 그렇지 못하다. 주로 희생물로 등장하는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에 스스로를 일치시키기란 달갑지 않고 그 결과 '스위치 끄기'라는 부가적인 절차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을 인정한다면 힙합에서도 비슷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힙합의 서사는 액션 영화의 그것과 유사한 지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알탕 세계관 하에서 더욱 쉽게 성립하는 것들이다. 때문에 여성 래퍼들과 여성 리스너들은 대단히 오랫동안 국내힙합의 틀안에서 여성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를 해왔다. '걸크러시' 혹은 '보이쉬', 혹은 '실력파'라든가 '여성스러움', 슬릭에 이르러서는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소재로 삼는 등 상당히 다양했는데 결국 몰입 가능성과 주체성을 찾고자 하는 욕망 하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를테면 '스위치를 끄지 않고'서도 힙합을 즐기기 위한 방법론의 개발이었던 셈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영지에게서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우승 소식도 시큰둥한 느낌이다. 하지만 여성 리스너들에게 호응하는, 혹은 여성 플레이어들이 만들어낼 여성들의 힙합은 오랫동안 탐색되어 왔고 지금 여기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이영지의 우승을 "우승 당했다"며 의의를 축소하더라도 그러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힙합이라 여기는 힙합은 미래에 얼마나 '힙합'다울까? 붐뱁이 더리사우스로, 다시 트랩으로 옮아오는 동안 그것들은 모두 힙합이었고 과거에 의심의 여지 없이 힙합 그 자체였던 붐뱁은 거꾸로 젊은 세대로부터 '틀딱' 힙합이 되었다. "그냥 여자라서 편들어 준 거 아니냐"로 퉁치기엔 좀 더 미세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굳이 써 봄. 여하간 우리는 동일시의 문제와 '욕망이 이미 거기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p.s : 근데 유튜브 힙합이니 국밥 운운하면서 불필요하게 이영지 올려치기하는 건 좀 불편하다. 돌아다니는 짤 말고 방송 분량을 보면 그렇게 힙찔이스러운 대목이 아니었음. 그냥 꽁트 같은 장면이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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