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나는 스무 살의 즐거움이 한창이었다. 고3이었던 동생들은 대입 입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IMF가 어느 정도 지나면서 가정경제도 조금씩 형편이 풀리는 중이었다. 그 무렵 부모님은 물 좋은 온천을 다니시며 자식들의 10대 육아가 끝남을 만끽하고 계셨다. 앞으로 좋을 일만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그런 평범한 나날 중 하루였다. 나는 대학교 친구들과 스키장에 처음으로 다녀온 뒤 온몸이 부서지는듯한 고통을 느끼며 소파에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묵직한 근육의 통증과 싸우며 나른함에 취해 있었다.
“엄마랑 온천 갈래?”
“미안. 나 못 움직이겠어. 아빠랑 잘 다녀오세요. “
엄마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손만 까딱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오래도록 후회스러웠던 것은 엄마의 마지막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는 것. 적어도 얼굴을 보고 인사했다면, 1분 만이라도 얼굴을 제대로 봤다면, 후회가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던 10초. 그 10초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사고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했다. 외로웠다. 우울했다. 목욕탕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삶의 매듭 같은 중요한 일이 내게 펼쳐질 때면 엄마의 부재가 나를 옥죄어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때로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담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가 짙은 슬픔에 닿을 것 같으면 도망쳤다. 사실을 모른 척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20여 년이 지나 마흔이 넘고 나니 이제야 엄마의 죽음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러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기억하고 싶어졌다. 제사, 추도예배 같은 인위적인 형식 대신 동생들과 얘기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죽어서 자식들이 혹은 후손이 제사를 지내면서 힘들고 하기 싫다면 받는 나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자식들이 한데 모여 시간을 보내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할 것 같다. 엄마가 좋아했던 와인을 찾아주며 떠올리고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무척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느낄 것 같다.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우리 집 식구들은 엄마의 죽음에 대해 어떤 감정이었는지 한 번도 표현해 본 적이 없다. 서로 많이 아팠을 텐데. 그저 각자 묵묵히 견뎠다. 언젠가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잊으려고 애쓰던 시간이 길어지고, 사라진 시간을 내가 만든 가족으로 채우고 나니… 엄마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점점 사라져 간다. 그게 좀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