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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병우 Feb 16. 2019

15. 트레킹 셋째 날

잉여로운 하루

2/12 6시 반에 잠에서 깼다. 아직 일출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다. 얼른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롯지 마당에서 일출을 기다렸다. 구름 때문에 해는 안 보이지만 눈 앞의 안나푸르나 남봉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잠시 후 그 옆의 히운출리도 황금빛으로 물든다. 마차푸차레는 고도가 낮아서 그런지 그냥 서서히 밝아진다.


아세타졸아마이드를 먹지 않은 덕분인지 간밤에는 화장실에 한 번만 갔다. 그리고 역류성 식도염 증상도 눈에 띄게 개선되어 거의 나은 듯하다. 아세타졸아마이드는 이번에 처음 먹어보는 약인데 나한테는 잘 안 맞는 모양이다. 식도염 증상은 개선된 반면 얼굴 살 떨림은 아직도 간헐적으로 느껴진다.


아침식사로 어제저녁 먹었던 닭고기 수프를 주문했었다. 역시 맛이 예술이다. 모한에게 오늘 난 여기서 하루 더 머물고 가겠다고 얘기했다. 모한의 얼굴이 밝아진다.


ABC를 포기하고 목적지를 Poon Hill로 수정하면서 준비물에 차질이 생겼다. 본래 고도 3000m 이하에서는 가을 등산복을 입고, 그 이상 올라갔을 때 겨울 등산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3000 이상을 올라갈 일이 없어졌으니 어제까지 입었던 옷을 빨아야 한다. 빨래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봤더니, 롯지 뒤편에 세탁기가 있으니 직접 빨라고 한다.


빨래? 그거 내 전공이지.. 우리 집에서는 나하고 우리 아들만 세탁기를 쓰는 것 같다. 아들 빨래를 일반 코스로 했더니 아들이 자기 옷은 소중해서 섬세 코스로만 한다고 앞으로 나더러 자기 빨래는 하지 말란다. 그러면 나야 고맙지..


세탁기를 돌려놓고 모한에게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자고 했다. 모한이 자기도 안 가봤지만 저 아래 박물관이 있으니 한번 가보자고 한다. 설렁설렁 걸어서 박물관이라는 곳에 가보니 이런저런 낡은 소품들을 모아놓은 초라한 집 한 채가 있다. 관람료 75루피를 내고 둘러봤다. 집 안 한구석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글이 씌어 있고 작은 불상도 있었다. 온 김에 불상 앞에 향을 하나 피워 올렸다.


박물관 옆 건물에서는 이곳 Gurung 지방의 전통 의상 체험을 하는 곳이 있다. 카트만두에서 왔다는 젊은 여자 3명이 옷을 갈아입고 즐거워하고 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나도 갈아입을 테니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쿠크리를 찬 Gurung 전사의 모습으로 젊은 아가씨들과 한컷 찍었다.


박물관에서 돌아와 빨래를 널고 점심식사로 볶음밥과 토마토 수프를 시켜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는 햇볕 내려쬐는 롯지 앞마당 테이블에 앉아 민트 티를 한잔 하며 브런치 글을 정리하며 잉여거렸다. 롯지 마당에는 개 한 마리가 나처럼 잉여롭게 늘어져 있다.

늘쩡거리다 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주방장한테 뭐가 좋겠냐고 물으니 달밧 먹어 봤냐며 옆에 온 독일 할배들이 시켰으니 그거 먹으라고 한다. 치킨 달밧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달밧은 이곳 사람들의 정식 같은 거란다. 후식으로 Rice pudding과 민트 티도 시켰다.


마당에 나와서 후식을 먹는데 갑자기 정전이 됐다. 전기불이 꺼지니 대신 밤하늘에 별들이 한꺼번에 불 켠다. 이럴 때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별이나 보면 좋겠다 싶어서 낮부터 모한한테 장작 좀 준비해 보라고 했는데 결국 장작을 못 구했단다. 별자리를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오리온좌도 찾았고, 작은 곰자리도 찾아서 작은 곰 꼬리의 북극성도 확인했다. 불기운이 없으니 추워서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모한이 내일 가는 길에는 눈이 있어서 아이젠과 스패츠를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Windy.com 예보에 따르면 오후 3시부터 비 예보가 있다. 그전에 Tadapani에 도착할 수 있게 서두르자고 했더니 모한이 내일은 좀 쉬운 코스라서 가능할 거라고 한다. Bhaisi Kharka에서 점심 먹고 나면, Bhaisi Kharka-Tadapani 사이에는 눈길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염려했던 왼쪽 무릎은 아직까지 큰 문제없는데, 대신에 오른쪽 종아리 근처 인대가 무리했는지 알이 하나 생기고 약간 부은 것 같다. 오늘 밤 안타푸라민 로션과 파쉬 물주머니로 풀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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