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같으면 다시 ABC로?
2/13 오늘도 어김없이 알람으로 6시 반에 일어났다. 여기 Ghandruk Village Eco Lodge의 좋은 점은 침구가 깨끗해서 침낭을 꺼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불을 걷고 침대 위에서 정성스럽게 스트레칭을 했다.
아침식사 전에 밀크 커피를 한잔 한 후에 미리 예약해 놓은 닭고기 수프를 먹었다. 이 집 주방장의 닭고기 수프 맛은 일품이다. 식사 후 시원하게 근심도 덜고, 짐을 다시 싼 후에 체크아웃을 하러 갔다. 2박 5식에 5500루피, 우리 돈으로 5만 5천 원 꼴이다. 촘롱의 Excellent View Top Lodge보다 전망도 뒤지지 않으며, 방이나 침구의 청결도는 훨씬 우수하고, 음식도 훨씬 맛있는데 가격은 더 싸다. 롯지를 나오면서 주방장한테 팁도 조금 줬다. 팁이라고 해 봐야 100루피, 우리 돈 천 원이지만.. Pokhara에서 이곳 Ghandruk 동네 바로 입구까지 지프로 올 수도 있다고 한다. 다음에 네팔에 다시 온다면 이 집에서 며칠 푹 쉬다가 가도 좋을 듯하다.
오늘은 Bhaisi Karka를 거쳐 Tadapani까지 가는 것이 목표다. 모한이 오늘은 아주 쉬울 거라고 했다. 출발한 지 1시간 남짓 지난 9시 반 경에 반대편에서 오는 그룹을 만났다. 내 또래로 보이는 우리나라 아저씨들 4명이 오길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더니 반가워하며 인사를 받는다. Tadapani에서 출발했다는데 도대체 몇 시에 출발했길래 벌써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걸까 의아했다.
내 걸음이 느리다는 것은 인정한다. 나는 최대한 땀이 덜나고 숨차지 않게 걸으려고 노력한다. 조금 빨리 갈 수 있을 때도 일부러 호흡을 가다듬으며 호흡에 맞춰 걷다 보니 오르막에서는 마치 내가 슬로 모션 영화를 찍는 듯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슬로 모션일 뿐 최소한 정지는 아니다. 약 30분에 한 번은 배낭을 멘 채로 행동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1시간에 한 번은 약 5분간 휴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11시경이 되어서 Bhaisi Karka에 도착했다. 2시간 반쯤 걸린 셈이다. 여기까지 4.3km 정도 되니까 시속 1.7km 수준이다. 이 정도가 내가 북한산에서 연습할 때 아주 천천히 걷던 그 수준이다.
모한이 어두운 표정으로 Tadapani는 Ghorepani, Ghandruk, Chhomrong 3군데랑 통하기 때문에 숙소를 미리 예약하려고 했는데 핸드폰 신호가 안 잡히는 데다가 어쩌다 걸려도 예약하려는 롯지에서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한다. 예전에 Poon Hill 다녀온 친구가 방이 없어서 롯지 식당에서 잤다고 했다. 좀 구차스럽기는 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할 수 없다. 잠시 후 다른 롯지하고 전화통화가 돼서 예약을 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Bhaisi Karka로 오는 동안 길이 질어서 바지 아래단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Bhaisi Karka에 도착해서 스패츠를 꺼내서 착용했다. 스패츠를 우리 집 현관에서 연습 삼아 차보고는 이번에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하는 거다.
점심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딸아이를 하나 데리고 트레킹 하는 중국인 부부가 왔다. 중국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홍콩 위에 있는 광저우에서 왔다고 한다. 딸이 몇 살이냐고 물으니 9살이라고 한다. 깜짝 놀라 도대체 당신들은 몇 살이기에 저런 큰딸이 있느냐고 했더니 아이 엄마가 자기가 곧 40 된다고 한다. 나는 20대로 봤다고 했더니 깔깔거리며 좋아한다. 여자들이란..
이 가족은 8시에 Ban Thanty에서 출발했다는데 10시 반에 Tadapani까지 왔고 11시에 Bhaisi Karka까지 왔다. 그 길은 내리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빠른 속도다. 9살짜리 딸은 우리나라 평창에 스키 타러 와서 처음으로 눈을 만져 봤고, 그때 김치를 먹어보고 김치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Ghorepani에서 쿠킹 스태프를 동반한 한국인 등산 그룹을 만났는데 김치를 싸온 것을 보고 얻어먹었다고 한다.
혹시 홍콩영화 장만옥 주연의 첨밀밀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그 나이면 첨밀밀을 알만도 한데.. 때마침 내 핸드폰에 있는 도깨비 OST를 틀었더니 ‘Ghost’라며 더 크게 틀어 달라고 하고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출발 전에 사진도 같이 한 컷 찍었다. 한국에서는 러브스토리 영화로 유명하고 주제가도 유명하니까 첨밀밀을 한번 찾아서 보라고 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Tadapani까지는 별로 멀지 않아 2시에 도착했다. Tadapani Guest House로 숙소를 정하고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옆방에 독일인으로 추정되는 커플이 Ghandruk에서 왔다며 내일은 Chhomrong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ABC에 갈 거냐고 물으니 눈이 많이 와서 위험하다고 해서 안 가기로 했다고 한다. 당근이지 나도 안 갔는데..
게스트하우스 베란다 복도에서 그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중에 건너편 게스트하우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러져 내려와 작은 눈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이다. 핸드폰 카메라를 손에 든 채로 눈이 쓸려 내올 때를 기다리는데 10여분을 기다려도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안 떨어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독일 여자애도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나하고 같이 비디오 촬영을 시작한다. 12분 만에 드디어 눈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저거 봐라. ABC 가는 길에 저런 위험이 있다.’며 잘 한 결정이라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저녁밥 먹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속은 출출해서 누룽지에 오뚜기 버섯해장국을 시전 했다. 그 맛은 과연 ‘갓뚜기!’다.
여기서는 인터넷도 안되고 심지어 핸드폰도 안 터진다. 베란다 복도 의자에 앉아 멍하니 산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가 싸 해지면서 날이 어두워진다. 3시부터 비 예보가 있었는데 진짜로 비가 올 기세다. 오는 길에 비를 만났으면 그거야 말로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는데 다행이다.
오늘 같은 강도로 트레킹 한다면 7일 연속 트레킹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여기서는 Chhomrong으로 다시 갈 수도 있다. maps.me 지도를 확인해 보니 여기서 Chhomrong-Bamboo-Deurali-MBC에서 하루씩 자면서 가면, 하루에 6시간 정도의 트레킹으로 MBC에서 ABC를 찍고 하산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ABC로 다시 방향을 바꿀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두 번의 계획 변경은 행동식도 부족하고 체력적으로도 더 부담이 된다. 최소한 지금은 분명히 아니다.
2/10 Chhomrong 체크포인트 앞에서 만났던 네히트 회원 만백붓님의 소식이 궁금한데 인터넷이 안되니 알 수가 없다. 만백붓님은 2/11 하루를 더 Chhomrong에서 대기하다가 2/12 Dovan까지 진출했다고 카톡을 받았었는데, 그 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젊은 친구들이라서 두려움도 없고, 객기가 발동한 듯하다.
출발 전 정형외과 진찰에서 왼쪽 무릎은 증세가 반월상연골파열일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워낙 천천히 걸어서 그런지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오른쪽 인대도 어제 안티푸라민 로션을 열심히 바르고 파쉬 물주머니를 대고 잔 덕택인지 많이 나았다.
저녁식사로 스파게티와 레몬 허니 티, 초콜릿 푸딩을 주문했는데, 스파게티가 그야말로 산 같이 많이 나왔다. 겨우 반쯤 먹고 포기했다. 후식으로 초콜릿 푸딩을 열심히 먹다 생각해 보니 카페인이 들어있으면 숙면에 방해가 될 듯해서 반만 먹고 남겼다.
가이드 모한의 말로는 내일은 오늘보다는 많이 힘들 거라고 한다. 내리막으로 시작해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야 하고, 길도 미끄러워서 7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모한에게 나머지 일정에 대해서 내일 2/14 Ghorepani, 모레 2/15 Ulleri, 글피 2/16 Australian Camp, 그리고 2/17 Pokhara로 복귀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가이드 계약이 6일이었으니 2일에 대한 초과 요금을 더 내면 되고, 2/18 아침에 모한이 정식 가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에 참석하는데도 문제가 없게 해 줄 수 있다.
내일의 목적지 Ghorepani는 해발 2800이고 가는 길에 해발 3300 정도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해발 2500이 넘으면 고산증세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저녁식사 후에 비아그라 25mg과 아세타졸아마이드 한 알을 먹었다. 1시간도 안돼서 여지없이 또 역류성 식도염 증세가 나타나며 식도가 타는 듯이 쓰리기 시작한다.
오늘도 파쉬 물주머니를 애인처럼 꼭 끌어안고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