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이 딱지를 뗐다.
2/14 오늘도 어김없이 6시에 눈을 떴다. 저녁에 9시, 10시만 되면 자니 아침 6시 기상은 일상이 되었다. 어제 먹은 고산병 예방약 때문에 간밤에는 화장실을 4번이나 가야 했다. 화장실을 한번 가려면 차가워진 내복을 다시 챙겨 입고 겉옷을 입고 바람 부는 베란다 복도를 지나 볼일을 보고 다시 돌아와서 차례로 옷을 벗고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지하게 귀찮다. 4번을 그 짓을 했지만 수면 품질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집에 있을 때보다는 더 깊이 잠드는 것 같다.
낮아진 기압 탓인지 내부로부터의 가스 방출도 더 잦고 우렁차다. 주먹을 쥐어 보니 약간 부은 느낌이 든다. 고산병의 초기 증세가 부종이니 예방약을 먹은 것은 잘한 것 같은데 식도염 증세 때문에 괴롭다. 인터넷은 여전히 될 기미가 안 보인다.
침대 위 스트레칭을 마치고 나와 보니 어제는 구름이 껴서 안보이던 봉우리들이 눈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아쉽게도 구름이 껴서 해는 안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해 뜰 때 산은 봤지만 정작 해는 못 봤다.
커피믹스 봉지가 복어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다. 이제부터 진짜 고산이 확실한가 보다. 아침밥으로 토마토 수프와 빈대떡 같은 얇은 빵 2개를 먹고, 빵빵해진 커피믹스를 터뜨려 마시니 화장실도 시원스럽게 해결된다. 계획대로 8시에 상쾌하게 출발했다.
Ban Thanty를 지나 본격적인 오르막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이젠을 벗고 있었다. 아이젠을 벗고 있는 한 외국 친구가 계속 기침을 하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마침 내 주머니 속에 든 트로치 사탕을 꺼내 한알을 건네주었다. 목에 좋은 것이니 빨아먹으라고 했더니 환한 얼굴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이제부터 드디어 본격적인 눈길이다. 스패츠와 마찬가지로 아이젠도 처녀 출전을 한다. 계단이 눈으로 덮여 보폭을 내가 조절할 수 있어서 눈길이 오히려 계단보다는 훨씬 쉬웠다. 올라가는 나보다 반대편에서 눈길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훨씬 위험해 보였다. 특히 아이젠 없이 내려오는 사람들은 자칫 실수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듯 위태롭다. 간혹 등산화 겉에 양말을 신고 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도 아이젠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서 한 것 같은데 효과는 좀 의문이다.
Ban Thanty와 Deurali 사이에는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좀 늦더라도 Deurali까지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1시가 지나서 Deurali가 가까워 오자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점심으로 뭘 먹을까만 생각하며 걸었다. 음.. 그래 ‘신라면에 계란 톡’이다. 1시가 넘어서 간신히 Deurali에 도착했다. 신라면에 밥까지 시켜서 말아먹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또 날씨가 갑자기 싸해졌다. 쉬는 동안 체온 유지를 위해 배낭 속에서 바라클라바를 꺼내서 뒤집어썼다. 이것도 오늘 처음 실전 투입하는 장비 중에 하나다.
Deurali를 출발해서 Ghorepani로 가는 중에 능선 위로 올라섰다. 모한이 여기가 Poon Hill보다 높은 해발 3300m라고 한다. 이번 트레킹 중에 가장 높은 고도로 올라 온 셈이다. 모한이 길 왼쪽 아래 산 중턱에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저기가 내일 갈 Ulleri라고 한다. 까마득한 아래쪽으로 보였다.
Ghorepani로 가는 중에 모한에게 어젯밤에 4번이나 화장실 가느라고 고생했으니 Ghorepani에서는 꼭 화장실이 있는 방으로 구해달라고 했다. Ghorepani를 앞두고 “15M Ghorepani”라고 쓰인 돌 의자에 앉아서 쉬며 15m만 가면 Ghorepani라는 얘기냐고 물으니 15m가 아니고 15분 거리라고 한다. 거리를 광년으로 표기하는 천문학적인 거리 표기법이다. 여기 15분만 앉아있으면 자동으로 Ghorepani에 도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빙긋이 웃었다.
Ghorepani에 도착해서 Dhaulagiri Hotel에서 1000루피를 주고 화장실 붙은 방 구했다. 실상은 호텔이라는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판잣집 수준의 건물이다. 그래도 화장실이 방에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여기도 인터넷은 안된다. 평소에는 잘 되는 곳이라는데 오늘은 날씨 때문에 잘 안된단다.
롯지 식당에서 불을 쬐며 쉬고 있는데, 목소리 큰 우리나라 아저씨들 4명이 들어왔다. 양평 사는 사람들이라는데 아마도 같은 교회 등산모임의 멤버들인 듯하다. 내일 Poon Hill에서 일출 보고 ABC 간다고 한다. ABC를 못 올라간 게 또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잠깐 인터넷이 되는 사이에 네히트에 만백붓님을 지명 수배한다는 글을 올렸다. 잠시 후 ABC를 찍는 데 성공하고 내려왔다는 답글이 달렸다. 무사히 다녀왔다는 카톡을 주고받고 포카라에 가면 차라도 한잔 같이 하기로 했다.
인터넷이 잠깐 되는 듯하더니 저녁밥을 먹고 난 후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난리가 나면서 인터넷도 끊어졌다. 그리고는 여름철 장맛비같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이래 가지고 내일 일출은 고사하고 Poon Hil까지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내일은 Poon Hill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날이다. 보통 1시간을 잡는데 나는 느리니까 1시간 반 전인 5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내일 Poon Hill을 위해 속이 쓰리지만 또 비아그라와 아세타졸아마이드를 먹었다.
오늘 밤엔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