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어쩌면 나 자신
그녀는 나를 모르지만, 난 그녀를 안다. 그리고 언제부터,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내 삶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랬다.
친한 친구의 블로그에서 짧지만 위트가 넘치는 덧글을 만났는데 난 바로 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유 같은 건 필요치 않아, 그냥 행복해야 해_일기 쓰는 고양이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에 갔는데 원탁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난 친구를 찾는 척 그 옆을 몇 번 왔다 갔다 했고 덕분에 그녀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그날 그녀는 푸른색 도트무늬가 있는 진보라 코튼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우연이려니 했다. 그러다가 지난가을, 빨간 구두를 신고 어디론가 급히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광화문에서 발견했을 때는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 여자, 왜 자꾸 내 시간에 들어오는 걸까.
신경이 쓰인다.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가.
몇 살일까? 트레이닝복에 패딩 베스트를 입었을 땐 이십 대 후반 같기도 하고,
가죽팬츠에 화이트 셔츠차림은 삼십 대 중후반?
얼굴 가득 생각을 담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길을 걷던 날의 그녀는 오십대로 보였다.
나이... 그 여자의 나이를 모르겠다.
이름은 뭘까.
‘일기 쓰는 고양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그녀지만 종종 로베스피에르, 굿 루저, 사드여친, The roots 같은 다른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불쑥 고개를 내밀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안다. 아무리 이름을 바꿔도 그녀라는 걸. 그 이유는, 길건 짧건 그녀가 남긴 글들에는 그녀만의 텍스쳐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걸 뭐라고 정리하기엔 내 글솜씨나 표현력이 너무 형편없기에, 여기 그녀가 쓴 글 몇 개를 예로 들어 나의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다.
...내 특이한 습성 중 하나는 평소엔 절대로 사투리를 쓰지 않다가 살인을 할 때만 심하게 사투리를 구사한다는 거다_사드여친
...난 그만 눈을 감고 만다. 이빨을 드러내며 서늘한 미소를 던지는 어린 소녀 같은 기요틴. 그 순진한 미소 속에 감춰진 광기를 차마 견딜 수가 없었던 걸까. 잠시 후면 내 목은 몸을 떠나 데굴데굴 광장으로 굴러가겠지_로베스피에르
...어라? 저기서 비실거리며 방구총을 쏴대는 저 녀석, 왠지 낯익다. 어디서 봤더라... 그다지 훌륭하지 못한 기억력을 더듬다 N은 결국 녀석의 존재를 찾아낸다. 고등학교 때 골목에서 수시로 마주치던 그 녀석, 어느 날인가 지하철 입구에서 파는 싸구려 장미 다발을 던지며 후다닥 도망치던 그 녀석이다. 아, 이런. N의 입에서 슬픈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무리 루저라지만 저런 녀석과 엮일 순 없다_굿 루저
...나무는 모든 힘을 다해 자기의 섹시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아무리 인간이라지만 결국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말 거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나무는 꽃을 피웠고, 바람을 불러 잎을 떨구었으며, 가지마다에는 산뜻한 싹을 틔워 싱그러움으로 치장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린다. 오, 매치메이커님이시여. 제게로 그녀를 돌아오게 해 주소서. 제 온 영혼의 힘을 다해 기원을 드리나니. 나무의 간절한 바람이 통했던 걸까. 어느 날 나무는 저기 멀리서 환한 형체를 발견하곤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그녀다, 그녀가 왔다_THE ROOTS
어떤가? 당신도 느꼈겠지만, 그녀의 글들은 하나하나가 유니크하고 기억에 남는다. 내 생각에 그녀는 그날그날 글을 쓰기 전 어떤 글을 쓸 것인가를 정한 후, 여러 개의 이름 중 하나를 고르고 그 이름에 맞게 자신을 싹 바꾸는 것 같다. 나이, 성격, 혈액형과 옷차림까지도 모두 갈아입는 것이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그건 아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작가일 뿐.
그런 그녀를 오늘 난 바로 내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아침에 이태원 존슨탕을 먹고 있는데 드르르 가게 문이 열리더니 싸늘한 겨울바람이 훅 불어 들어왔다. 그때 사실 난 그녀라는 걸 알았다. 그냥 알았다. 과연, 잠시 후 그녀는 내 앞으로 와 풀썩 소리 나도록 내 앞에 주저앉았다. 때가 꼬질한 헝겊 방석과 그녀가 입고 있는 너풀거리는 체크무늬 플레어스커트 자락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런 옷차림으로 이곳에 왔을 땐 무슨 이유가 있겠지 라고 난 생각했다.
"칠면조 소시지 추가요. 소주랑 잔도 하나 주세요."
아침에 존슨탕도 좀 그런데, 소주라니. 슬픈 삼십대로 보이는 그녀가 소주잔을 홀짝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일본식 아침상 차릴 수 있어요?”
“네?”
“난 그거 참 좋아하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와츄 솥에 연근을 듬뿍 넣은 그 고슬한 밥 있잖아요, 그거 만들 줄 알아요?”
“...아마도요.”
“그럼 내일 나 그거 해 줘요. 작업실에서 10시에.”
“네?”
“우메보시 냉장고에 있죠? 그것도 같이 먹을 거예요.”
“...우.메.보.시.”
“캬~! 오늘은 진짜 소주 마시기 좋은 날이에요.”
"그...쵸."
"아참, 난 쿠미코예요. 당신은?"
"..."
"쓰미마생~ 신경 쓰지 말아요. 이름 같은 게 뭐라고."
그녀와의 짧은 아침. 어느새 사라진 그녀의 빈자리를 한참 바라보며 난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감자를 숟가락으로 긁어먹는다. 이상하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걸까.
모닝 카페엘 들어간다. 얼떨떨한 내 정신에는 지금 진한 커피가 간절하다.
오전 10시. 소주 1병을 존슨탕과 소시지 덩어리와 함께 해 치운 오늘의 그녀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갈까.
오늘, 어느 순간 그녀는 내 앞에 불쑥 나타났고, 그리고 쿠미코라는 이름을 남기고 떠났다.
쿠미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인공이잖아. 장애를 가졌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는 슬픈 캐릭터라니. 존슨탕에 소주를 아침으로 먹기엔 완벽한 이름이 아닌가.
그럼 난 츠네오. 뭐 내가 츠마부키 군처럼 잘 생겼다는 게 아니라. 아, 이 어설픈 작명은 뭐지. 그녀가 쿠미코면 난 츠네오여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런데 다른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아. 이거, 뭔가 빠져드는 불길한 느낌...
It’s perfect way to write a new prologue.
let me kiss your lips and I shall know it’s real...
모닝카페에선 프리템포의 ‘Dreaming’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래. 오늘은 어쩌면 완벽한 프롤로그 데이, 어쩌면 그녀를 위한 새로운 시작인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에스프레소 바닥에 그녀의 얼굴이 비친다. 그리고 어느새 난 그녀와 일본식 아침상을 마주하고 웃고 있다.
그녀는 내 꿈속의 여자일까. 그래서 난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그녀가 원할 때, 그녀의 방식으로 내 인생에 들어오는 걸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어쩌면 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어쩌면 그녀는 내 꿈의 한 조각,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