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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캣 Jan 30. 2019

고마워요, 나와 닮아줘서

마녀가 고양이에게

"고양이 마녀."

"뭐?'

"고양이 마녀라고, 언니는."


M의 갑작스런 말에 Y는 피식 웃음이 났다. 


"왜 웃어? 마녀라는데."

"응... 전에, 누군가도 나한테 그런 비슷한 말을 했거든."


고양이, 마녀. 고양이 마녀. 닮은 듯 닮지 않은 이 두 단어는 Y를 잠시 잊고 있었던 오래된, 꽤 오래된 공간과 시간으로 옮겨다 주었다. 그것이 단어의 힘. 




"고양이 좋아하시죠?"

"네?"

"크! 맞잖아요. 그쵸?"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데스크톱에 온통 고양이 사진이잖아요. 샴, 페르시안, 라가머핀, 버미즈, 발리네즈, 맹크스, 러시안블루, 라팜, 시베리아, 싱가퓨라, 아메리칸 쇼트헤어, 스코티시폴드, 셀커트렉스, 아메리칸 와이어 헤어, 이그저틱, 통키니즈, 노르웨이의 숲..."

"...노르웨이의... 숲이요?"

"네. 노르웨이의 숲이요. 고향이 노르웨이인 북유럽의 자작나무 숲을 닮은 고양이예요. 나무를 아주 잘 타고 사냥도 잘해요. 생긴 것도 꼭 노르웨이 지도 같다니까요. 용감하고 총명한 종이예요."

"아...."


그를 만나기 전까지, Y는 이 세상에 그런 유형의 인간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었다.  그때까지 Y는 자신이야말로 고양이 전문가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Y보다 고양이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양한 고양이 종에 대해 또박또박 정리를 할 줄 알았고, 신중하고 사려 깊게 단어를 골라 사용함으로써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Y는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그' 사람이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만으로도 그를 사랑하기엔 충분했다. 나를 닮은 사람이라는 그 이유면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그 이유가 이별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걸, Y는 알지 못했다. 


"넌 마녀야. 고양이 마녀."


3년 후 그는 이 말을 남기고 Y를 떠났다. 그가 왜 자신을 고양이 마녀라고 불렀는지 Y는 알 수 없었고 묻지도 않았다. 그가 지신을 뭐라고 부르든 그건 그의 문제다. 그가 왜 떠나는지 그 또한 그의 문제다. 한 때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해서 그가 선택하는 단어에 손을 댈 수도, 또한 그가 선택한 이별을 막을 수도 없다는 걸.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건 그가 남긴 그 말 때문이다. 그는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Y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Y는 안다. 고양이. 그건 그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 마녀. 그건 어쩌면 그가 가장 증오하는 단어. 그는 그렇게 두 가지 상반되고 이질적인, 하지만 동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를 선택해 그녀를 칭함으로써 자신의 오래된 애증의 감정을 털어낸 것이리라. 신중하면서도 깊은 고민의 흔적을 지닌 단어 선택.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니! 언니!!!! 어~언니!!!!"

"...응?"

"내 말 안 들려? 무슨 생각해?"

"...응....생각."

"그니까 무슨 생각?"

"...그냥 나를 닮은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Y는 비 오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닮은 게 아니라고. 어쩌면 그는 자신과는 만날 수 없는 평행 세상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라고.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던 두 사람이 잠깐, 아주 잠깐 한 지점에서 우연히 만난 거라고. 다시 만나려면 아주 먼 길을 걸어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그리고 그건 아주아주 힘들고 희박한 일이 될 거라고.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이제 거의 멈췄다. 가끔씩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크기와 낙하 간격의 불규칙함으로 볼 때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듯했다. 어떤 나무일까. 이렇게 예쁜 물방울을 떨어뜨릴 줄 아는 나무는. Y는 우산을 접고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봤다. 빗방울을 머금은 이파리들이 반짝거리는 나뭇가지 사이에 회색의 길고 우아한 털을 지닌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노.르.웨.이.의.숲.


고마워. 나와 닮아줘서. 나를 닮은 게 당신이어서, 당신을 닮은 게 다른 누구가 아닌 나여서 정말 좋았어. 고마워.


라고 노르웨이의 숲은 말하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충직해 보이는 눈으로 Y를 보며. 


어느 비 개인 오후. 

그래서 Y는 행복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을 닮은 그가 있어서.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을 마녀라고 불렀던 그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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