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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긍정 Aug 06. 2017

'효율성'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기

*본 글은 격월간 민들레 통권 111호 및 프레시안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 효율성을 추구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나라     


얼마 전 국가 R&D(연구개발) 발전 전략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대한민국이 'GDP 대비 R&D 비중 세계 1위'라는 수치였다. 재밌는 점은 수조 원의 세금을 쏟아붓고도 제대로 된 연구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의 이런 모습을 '코리아 R&D 패러독스'라 부른다고 한다. (하단 링크 참조)


연구개발 투자는 가장 많이 하면서도 그 결과는 세계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나라, 이 결과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룬 이 나라 곳곳에선 효율성의 상흔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좋은 성과를 빠르게 내기 위해 투자와 혜택을 다수의 중소기업이 아닌 소수의 대기업에 '몰빵'하는 모습, 지진, 화재 등 당장 닥치지 않은 사건 예방에는 예산을 충분히 편성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터지고서야 소 잃고 부랴부랴 외양간 고치는 모습, 언제 어떻게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는 원자력을 신재생 에너지로 대체하기는커녕 추가 설립 계획을 세우며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도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정말 효율적인 나라가 되었는가? 그 결과는 참담하다. 효율성을 추구하면서도 가장 비효율적인 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오죽하면 멕시코, 한국, 터키를 묶어 'OECD 개노답 삼형제'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단 링크 참조) 


OECD 회원국 중 최장 노동시간을 기록하면서도 1인당 GDP는 그에 못 미치는 나라. GDP 대비 R&D 투자는 가장 많이 하면서도 과학기술 수용성 평가지수, 기업혁신지수는 하위권인 나라. 무엇보다 학생들의 공부 시간은 압도적으로 길고, 자신감과 학습 흥미도는 최하위인 나라. 노동, 연구개발 분야 등도 문제지만 교육에서만큼 '비효율'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한국의 교육은 '효율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효율성은 교육을 어떻게 망가뜨리는가 


효율성은 일반적으로 투입 비용 대비 산출 결과로 정의할 수 있다. 교육에서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투입 비용과 산출 결과가 나타난다. 학교의 관점에서는 인건비, 시설 투자비, 각종 교육 기자재, 관리비 등이 투입 비용이고, 교사의 관점에서는 수업 준비 시간, 교수법 연구 시간, 각종 연수 시간 등이 투입 비용일 것이다. 학생의 관점이라면 공부 시간일 것이다.


문제는 산출 결과다. 한국에서 교육은 개개인의 전인적 성장을 추구하기보다 '도구'에 가깝다. 국가 입장에서는 소위 '인재'를 키우기 위한 사회화 과정으로, 개인의 입장에서는 남들보다 더 성공하기 위한 '지위'를 얻는 과정으로 교육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올 수 있는 산출 결과는 결국 측정 가능한 '성적'일 것이다. 남들과 비교 가능한 수치 말이다. 우월한 위치를 보장하는 성적은 수치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경쟁을 유도하며, 국가가 원하는 사회화 과정을 학교라는 틀에서 수행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개인과 국가가 서로 윈-윈 하는 구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학교의 존재 목적은 소위 말하는 명문대 진학이 되어버렸고, 남들보다 우위에 서야 하는 상대평가의 틀 속에서 학생들은 '과잉경쟁'에 빠져 있다. '좋은 성적'이라는 산출 결과는 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잘 알면서도 한국의 학생들은 산출 결과의 극대화를 위해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비단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한 '효율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오찬호의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 펴냄)나 EBS 다큐멘터리 <공부의 배신>에서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이 투입한 비용만큼의 산출 결과를 얻기 위해 차별마저 정당화하는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탈조선'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힘든 경쟁을 피하기 위해 이민을 생각하거나 결심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풋(input)의 관점에서 보면 투입 비용을 줄여야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투입한 많은 비용을 보상받기 위해(손실 혐오)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노력이라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가장 비효율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아웃풋(output)의 관점에서는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얻고자, 아니 좋은 결과를 얻어야만 하기에 각종 편법마저 합리화하며 결과를 만들어내다 결국 사회 곳곳에 왜곡된 결과나 잠재적 위험들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 위험들이 사고로 이어지는 순간 결과적으로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치르게 된다. 언제 다시 두 번째, 세 번째 세월호 참사가 터질지 모르는 일이다.


교육 또한 어느새 모두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교육이 되어버렸다. 교사 권재원이 쓴 <학교라는 괴물>(북멘토 펴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효율성을 위한 경쟁은 승자에게 추가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패자의 몫을 삭감하여 승자에게 얹어주는 식의 경쟁이다.


성적 지상주의의 팽배로 공부 잘하는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1:1 멘토링 학습의 기회를 주거나, 주요 과목 특강을 들을 수 있는 특별반을 편성하고, 별도의 자율학습 전용실을 만들어주고, 최신식 기숙사 우선 입주권을 주고, 인터넷 강의료를 지원하는 등 각종 혜택이 주어지고 있다.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친절히 대하는 학교 문화는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서적 차별이다. (하단 영상 참조)


<출처 : EBS 지식채널e - 성적, 그 놈>, 성적을 통한 차별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공부 역시 과정은 중요치 않다. 성적만 잘 나오면 된다. 내 실력이 아니더라도 찍어서 맞춘다면 그걸로 족하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교재든 강의든 요점만 잘 정리되어 있으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미 내 공부가 아닌 것이다. 성적을 올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경험은 시도해볼 수도 없다. 


하지현 교수와 엄기호 교수가 함께 쓴 <공부 중독>(위고 펴냄)이라는 책의 내용을 빌리자면, 우리는 남이 해놓은 공부를 '구경할 뿐'이다. 그러니 시험이 끝나면 구경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교육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의 전제는 측정 가능한 산출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대표적인 산출 결과인 '성적'은 정말 개개인의 역량을 온전히 담아내고 타인과의 비교 가능한 객관적인 수치인가.

잘못된 전제 자체가 교육을 망친 근본 원인일지도 모른다. 


효율성이 교육에 적용되는 순간 측정 가능한 수치만 추구하게 되며, 창의력, 인성, 공감 능력, 협동 능력, 리더십 등 애초에 측정이 불가능한 것조차 억지로 수치로 환산하다 보니 왜곡된 결과를 초래한다.


처음부터 교육은 효율성과 어울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효율성 때문에 정말 중요하지만 측정이 불가능한 교육적 가치와 개인의 역량들이 모두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교육의 진정한 역할은 바로 이 측정 불가능한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 아닐까. 



|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나 먹었어 밥을" "타임 몇 시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영어 조기교육으로 인해 우리말 어순이 아닌 영어식 어순으로 대답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어릴 때 일찍 영어를 배우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조기교육이 성행하며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단 링크 참조)  


교육 또한 언제까지 효율성을 이유로 투입 비용 대비, 의미 없어 보이는 산출 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학생들을 경쟁시켜야만 할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효율성을 이유로 모든 기능들을 스마트폰 하나에 다 구현하는 게 마냥 좋은 것일까. 처음엔 많은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것이 좋아 보였지만 기능들이 지나치게 많다 보니 정작 쓰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오히려 단독적인 기능을 가진 기기를 쓰는 것이 편할 때도 있다.


스마트폰도 이러한데, 하물며 교육은 어떨까. 기존 교육과정을 그대로 두고 인성교육, 소프트웨어 교육, 문·이과 통합교육 등 새 교육과정이 계속해서 추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최신형 스마트폰처럼 그때마다 필요한 교육들을 매번 더하기만 할 것인가. 이미 과부하가 걸린 한국의 교육도 곧 방전되는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하다. 아니, 차라리 방전이라도 되어 새로이 재충전되면 좋겠지만 지금의 모습 그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더 문제인지도 모른다. 

설사 효율성을 추구한다고 해도 잘하는 학생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 효율적일까, 아니면 못하는 학생들에게 지원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까. 잘하는 학생들은 알아서 잘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 학생은 더 못하는 학생이 아닐까. 어쩌면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미 효율성의 덫에 빠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처럼 자원이 부족한 작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아이의 재능이건 잃어버릴 여유가 없다."  


우리나라 얘기였으면 좋았겠지만, 핀란드의 얘기다. 핀란드 역시 한때 고민의 기로에 있었다. 영국, 미국 등 많은 국가들이 효율성과 경쟁을 기반으로 한 교육을 선택할 때 핀란드는 오히려 반대편 길을 택했다.


바로 '모두를 위한 교육'이다. 그들은 "학교에서 협동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의 미래를 책임진다면 과연 그 사회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이미 우리는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등을 통해 그 참담한 결과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효율성을 추구한답시고 측정 가능한 역량만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측정이 어려운 창의성, 대인관계 능력 같은 역량이 중요해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엔 더욱 참담한 결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가치와 역량을 효율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순간, 아이들 각자가 지닌 조개 속 진주 같은 잠재적 능력은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동시에 다수를 교육을 하기 위해서 효율성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절대적으로 효율성만을 추구하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 적어도 효율성을 이유로 성급히 학생들을 줄 세워 평가하거나 단정 짓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해주는 교육은 언제나 지향해 마땅하다. 이를 위해선 학급당 학생 수의 적정화, 상대평가 폐지 등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할 것이다.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는 교육이야말로 더 효율적인 교육임을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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