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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May 14. 2020

어쩌면 인생엔 튀김옷 지수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지수는 결코 우리의 삶을 평가하지 못 한다.


ⓒ소선



주변보다 지대가 높은 언덕 위 옥탑방에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 세 식구만 단촐히 살던 시절이 있었다. 원래도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집안이었지만, 태어난 뒤 줄곧 지내던 서울에서의 생활을 더이상 영위하기 어려워져 우리 가족은 난생 처음 본 지방 소도시로 이사를 해야 했고, 벼룩의 간을 내먹듯 더 안 좋아진 경제 사정의 숱한 증거들이 집안 곳곳에 안개처럼 들어차있었다.


그때 우리집에는 일종의 세레머니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 달에 한 번 월급날을 맞은 엄마의 손에 들려오는 치킨 두 마리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오빠와 둘이 옥탑방만의 낭만인 평상에 앉아(하지만 군데군데 잔가시가 돋혀 있어 요령있게 앉는 것이 중요했다.) 해가 지는 시간 특유의 고요함을 배경삼아 투닥거리다보면 저 멀리 언덕을 오르는 엄마가 보였다. 치킨과 함께 언덕을 오르는 엄마의 보폭은 평소보다 성큼성큼 넓었고, 옥탑방을 올려다볼 때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며 흔드는 손짓은 만류의 느낌보다는 ‘내가 왔노라’라는 느낌처럼 어딘지 당당했다. 오빠와 나는 주인집 옆으로 작게 난 계단을 단숨에 올라온 엄마를 맞이하며 곧 펼쳐질 푸짐한 한 상에 온 신경을 빼앗기곤 했다.


현관 옆에 딸린 화장실에서 마치 손을 데치듯 대충 씻고 집에 들어가면 멀리 건너다 볼 필요도 없이 훤히 드러난 거실(겸 안방)에 상을 놓은 엄마가 치킨 박스 속의 은박지를 활짝 열고 있었다. 그때 먹었던 그 치킨. 나는 그 치킨이 너무너무 맛있어서 어떨 때는 빨아먹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아마 입천장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마리에 만원이었던 그 치킨은 사실 닭튀김이라기보다는 ‘살코기가 조금 들어간 튀김옷’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나중에 성인이 되고 일식집에 갔다가 우동 위에 올려주는 튀김의 잔부스러기를 보고 그 치킨이 생각나기도 했다.)


엄마가 홀로 돈을 벌며, 그마저도 80% 이상을 채무 상환에 소진해야 했던 지난한 3년의 시간이 지나고, 엄마와 우리 남매의 삶은 조금씩 나아졌다. 치킨의 튀김옷 속에 들어있는 닭의 살은 점점 면적이 넓어졌고, 더이상 두 마리에 만원짜리 치킨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닌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요즘 치즈가루가 뿌려진 치킨을 먹을까 갈비맛이 나는 치킨을 먹을까 하는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지낸다. 어쩌다 새롭게 문 연 가게에서 시켜 먹은 치킨이 기대에 못 미쳤을 때는 가감없이 비판을 쏟아부으며 ‘여긴 다시 시키지 말자’ 성토하기도 한다. 기름에 쩔어 불쾌한 튀김옷을 씹었으면서도 엄마와 오빠 모르게 후딱 삼키고 다른 튀김옷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 물던 옥탑방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왕래가 끊겼던 삼촌과 그의 허름한 집에서 오랜만에 식사를 하던 날,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파도처럼 밀려 들었다. 삼촌이 ‘이 근방에서 진짜 유명한 집에서 사온 것’이라며 꺼내놓은 치킨이 오빠와 나의 세레머니 속에 있던 그 치킨이었기 때문이다. 한 때는 빨아먹고 싶을 만큼 간절했던, 하지만 어느새 잊고 살았던 그 치킨은 어느 저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 생활이 주는 풍족하지 않은 풍족함이 무엇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로 목구멍이 콱 막힌 듯 단숨에 먹먹해졌다.


그러자 어쩌면 우리 삶에 튀김옷 지수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튀김옷 밖에 없나요? 좀 가난한 때로군요’ 내지는 ‘열심히 돈을 번다면 내용물이 충실한 것은 기본 옵션, 소스도 자유자재로 고를 수 있답니다’등의 선택지가 주어지는 그런 어떤 지표. 하지만 3년 간의 세레머니를 충실히 이행하며 내가 느낀 것은 세상엔 튀김옷만으로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들이 존재하고, 내용물의 면적보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가 중요한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름 쩐내가 유독 심하고, 늘 그렇듯 살코기가 장식처럼 들어있는 부류의 치킨을 다시금 접하며, ‘와 바삭바삭한거봐. 이 집 진짜 잘 하네’, ‘심지어 절임무도 맛있어’ 등의 추임새를 넣었다. 그건 오랜만에 보는 조카에 대한 삼촌의 세레머니였을 것이고, 그의 삶도 다시 진전을 거듭하며 이를 추억할 날이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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