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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May 15. 2020

살다보면 잊지 못 할 어른들이 있다.

그들을 떠올리다보면 나의 ‘어른력’을 돌아보게 된다.


ⓒ소선


얼마 전, 새로운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기 위해 정보를 맞춰 넣다가 비밀번호 확인용 질문을 고를 일이 있었다. ‘어렸을 적 살던 동네는?’,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은?’ 등의 질문을 제치고 난 늘 그렇듯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질문을 고르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은사님의 성함을 채워넣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내가 절체절명의 사춘기를 맞았던 시기였다. 자타공인의 모범생이었던 나는 항상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간간히 반장을 맡았으며, 교우관계도 원만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속에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폭발적 분노가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재혼 후 반목을 거듭하시는 부모님과 새엄마를 버거워하는 여동생, 무심한 오빠와 어린 동생들은 상대를 바꿔가며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가장 눈치가 빨랐던 나는 그 갈등을 건너다니며 중재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느낀 감정들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공통양식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감히 뱉어낼수도, 그렇다고 내내 끌어안고 있기도 버거운 그런 감정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여느 때처럼 착실하게 야간자율학습(a.k.a 야자)을 하고 있던 가을 밤, 나는 별안간 눈물을 펑펑 흘렸고 당시 야자 감독이셨던 선생님이 ‘잠시 바람 좀 쐴까?’라며 나를 데리고 운동장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나서는 별다른 이야기없이 내내 나의 눈물을 바라보셨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내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몇몇 교실에서는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너무나 민폐였겠다는 생각에 반성도 했다.)


시작이 그러했듯 울음 역시 별안간 끝이 났다. 한참을 울었지만 이유 모를 눈물이었고, 마침 머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엉엉하던 소리는 어느새 훌쩍으로 바뀌었고 그때서야 선생님은 침묵을 깨고 딱 한마디를 하셨다. ‘많이 힘들었지?’ 맙소사, 그 말을 듣자마자 훌쩍은 다시 엉엉으로 바뀌었고 그러고나서 또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 나는 그 대화를 붙잡고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다. ‘부모님도 부모님이 처음이라,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사는 게 너무 어려워서 그러신가보다’라는 말이나 ‘소선이가 정이 많아서 다른 사람 마음이 너무 잘 보이나봐. 선생님은 그게 또 부럽네. 그거 엄청난 능력이거든’이라는 말들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어른같았다. 어쩜 주문제작한 것처럼 내 마음에 꼭 맞게 치유가 되는 말씀을 해주실까하는 동경과 나도 꼭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퐁퐁 솟아나는 듯 했다.


해가 바뀌거나 명절이 되면 간혹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다. 소소한 연락을 주고 받다보면 선생님은 늘 그렇듯 보답을 바라지 않는 덕담과 격려를 건네주신다. 그게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한 편, 문득 ‘내가 지금 어른이 필요하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스스로가 어른이라고 여겨진 적이 없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직도 나는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켜줄 어른이 필요한 사람인 것만 같아서.


공자는 서른의 나이를 ‘이립’이라고 표현했다. 스스로를 세운다는 뜻이다. 기원전 사람이 한 말이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서른을 맞아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운동장에 앉아 한참 어린 제자의 아픔을 가르치지 않고, 얕잡아보지 않고 오히려 공명의 힘을 일깨워주신 선생님처럼, 나도 딱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참 좋은 어른이 존재했으니, 그러므로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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