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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urnuri Apr 16. 2016

경주 교동마을

校洞

교촌마을이라고도 불리우는 경주의 교동마을은 월성의 서쪽 끝으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작은 마을이다. 걸어서 한바퀴 둘러보는데 두어 시간이면 충분한 규모인데 여기에 얽혀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들어보면 정말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우선 교동마을에는 경주향교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고 주요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된 경주최씨고택과 경주교동법주가 있고 최근에는 월성 남쪽의 남천을 건너는 신라시대 월정교가 복원공사가 한창 이다.

경주 교동마을을 설명하려면 경주 최씨에 대해 설명을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경주 최부자집으로 불리우는 경주 최씨 집안은 12대에 걸쳐 만석꾼으로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영남지역 유력가문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집안에는 독특한 가훈이 전해 내려오는데 이 가훈을 들으면 이 집안 내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고, 재산은 만석이상을 모으지 말며,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고, 이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백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구구절절 의미심장한 말들뿐이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 인지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특히 구한말 이집안의 마지막 부자 최준은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가 나서 재산을 모두 압류 당했다 전해진다. 해방 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동업자 안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푼도 빠짐없이 독립자금으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먼저 고인된 백산의 무덤에서 통곡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한 애기다. 이후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전 재산을 지금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교 재단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이런 최부자집의 내력에 대해 확인하면서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감동스러웠다.

경주최씨 고택은 경주 월성과 지척이다. 이 자리는 원래 원효대사와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의 거쳐한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근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서려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가옥은 170여년 전에 건축한 목조건물로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가옥구조를 하고 당시 일반가옥에서 보기 어려운 좋은 목재를 사용했을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도 손색이 없다. 부지는 2천평 남짓이고 후원은 1만평에 달하는 99칸의 대저택이었으나 1969년 화재로 사랑채와 행랑등이 소실되고 현재는 안채와 사당,고방,문간채가 남아 있다.

교동마을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면서 문득 청송의 덕천마을 송소고택이 떠올랐다. 청송 심부잣집에도 경주 최부잣집과 비슷한 가훈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시대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만석꾼 두 집안의 내력이 그저 돈만 많아 부자 3대를 못 간다는 요즘 부자들과 많이 달랐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정신으로 후손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훈육해서 만석꾼 집안을 몇 대에 걸쳐 유지할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경주교동마을 웹버전 사진더보기]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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