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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길벗 소로우 Oct 27. 2023

나의 정체성

정체성을 찾아 헤맸다.


어딘가 있을, 내게 부여된 나만의 정체성, 그를 찾아, 마치 영웅의 옷을 입는 듯 그를 걸쳐 입고, 자랑스런, 빛나는 언덕, 그 위에, 내가, 굳건히 서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 승리한 인생이라, 완성된 인생이라 여기며, 정체성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런 정체성은 없다. 그것은 정체성이 아니다. 그건 타인에게 인식되어지고, 타인의 심상에 존재시켜 주고 싶은 '이야기'같은 것이다.


최근에 감명깊게 본 영상 중 하나는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살고 싶다'는 어느 시골 섬 마을에 철학자의 얘기였다. (그는 한때는 서울 명문 K대 철학과 교수였다) 그는 모두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겐 분명히 존재했던 정체성을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많은 이들의 환호 속에 잘 살아가고 싶다는...그런 막연한 정체성을 바라며 살았었다.

그러나 그건 정체성이 아니다. 자신에게도 없고, 남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환영 같은 것이다.


진정한 정체성은 모두에겐 잊혀졌지만, 혼자 즐겁고 뜨거웠던 그. 그이가 정체성이 아닐까?

야구장에선 자신의 팀을 위해 목이 쉬어라 외쳤던, 노래방에서는 잠깐의 라커, 합창단에선 자신의 목소리를 살짝 줄이고 전체의 화음을 만들어 냈던, 길을 걸으며 남모르게 쓰레기를 한 번 주었던, 혼자 자신의 시를 지었던, 4B 연필로 토요일 아침의 빛을 잠깐 담으려 했던, 테니스나 배드민턴 라켓을 힘껏 휘둘렀던, 그 모든 쪼개진 이들이 정체성이 아니었을까??


그리스도교 신관은 분열적이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신이라고 한다. 신과 사람의 아들과 거룩한 영이 하나라고 한다. 이들은 세개의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하나(일체)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분열적인 세계관이다. 하나이지만, 세 개로 인식된다. 실체로서 그들 셋은 따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복속한 하나였다.


아버지로, 아들로, 남편으로, 엄마로, 딸로, 아내로, 대리로, 부장으로, 갑으로, 을로, 클라이언트로, 컨설턴트로... 그렇게 분열적으로 살았던 분들을 본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설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에 대해 천착 혹은 허무를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누가 아는가? 정체성과 만나, 정체성의 그 옷을 입기 위해, 힘겹고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지치고, 패배해서 헐떡거리며, 스스로를 경멸의 눈으로 내려보는 당신에게,

정체성이 살포시, 따뜻한 봄비같이, 새벽여름 바람같이, 빛나는 가을볕처럼, 보드라운 첫눈처럼 내려와,

당신에게 임하고 당신과 하나가 될 줄 누가 알겠는가?


당신은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했지만,

그 긴 시간 내내 그대의 노래를 가만히 들어온 당신의 정체성은,

저 먼 곳으로부터 수십 년을 달려와, 결국 은은한 당신을 입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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