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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길벗 소로우 Jan 14. 2024

주제가 없는 글을 쓰는 작가


작가는 주제가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주제가 없는 글은 외면받기 일쑤이며, 적어도 작가라면 주제의식을 가지고, 주제 자체를 독자에게 던져 주어야 한다는 자기 속의 의무감, 그리고 세상의 규범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주제가 있는 글을 써야 할까? 주제가 있는 글을 쓰면 열독률을 높이게 된다. 열독률이 높아지면, 그 글에 반응이 일어난다. 그 글을 좋아하거나 옹호하는 부류, 또는 그 글을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부류. 그렇게 반응이 일어난다.

작가는 그런 반응을 즐긴다. 가급적 새로이 일어나는 반응과 논란들이 자기에게 우호적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열독률과 반응률이 높은 글 위주로만 쓰고자 한다면 그를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즉 특정 주제를 선명히 정해서만 (예를 들면 클릭의 양을 늘려서 자신의 추종자가 늘기를 바라는 그 목적 위주) 쓰고 있다면, 그가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화가 피카소는 평생 5만 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품은 ‘게르니카’, ‘아비뇽의 처녀들’ 정도이다.


시인 천상병은 평생 수천 개의 시와 평론을 썼고, 그의 사후에 일부만 모아서 편찬한 시선집은 분량이 수백 페이지 정도이다. 그런데 그를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하는 많은 독자들도 그의 시 ’귀천‘ 하나 정도 기억한다.


최근 배우 한소희 씨가 읽고 있다고 해서 유명해진, 페르난도 페소아 (Fernando Pessoa)의 ‘불안의 서’를 읽기 시작했다. 페르난도는 내가 브라질에 근무할 때 내 친구의 이름이었다. 페소아는 포르투갈어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브라질에 두고 온 ‘인간 페르난도’를 떠올리며 책을 펼쳤다. 읽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어떻게 백 년 가까이 묻혀 있었을까? 그리고 왜 50년 넘는 내 인생 동안, 어느 여배우의 언급 이전까지는 그 존재마저 모를 만큼 묻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난도 페소아는 사후에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추앙되었는데, 생전에는 평생 단 네 권의 책만 출간했다고 한다. 그러나 75개의 작가명을 가지고 글쓰기를 계속했다. 그는 100년 전 사람이다, 포르투갈 정부는 그의 남겨진 유고들을 정리하는데, 아직도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1988년까지 마친 작업량만 25574 페이지이다.


그의 책 ‘불안의 서’는 책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 같은 것은 없으며, 언제 어디를 펴서 읽어도 되는 단상으로 가득하다.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주제의식을 드러내라고 하면, 우리는 감히 엄두도 나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주제가 없는 삶을  살거나, 주제가 아주 분열되어 있거나, 나이 40줄이 되어서도 아직 자기 인생 주제를 못 찾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혹시 주제가 있었더라도 보통은 ‘생존’에 대한 것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연대기를 쓸 수는 없지만, 페르난도 페소아처럼 오늘의 한 페이지를 쓸 수는 있고, (원하는 이에게만) 이를 살짝 보여 줄 수는 있다.


야구선수 양준혁은 경기 상황과 상관없이, 항상 1루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그는 자신이 ‘그저 1루까지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난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한 번도 걸어서 1루까지 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은퇴 경기 때 그는 마지막에 내야 땅볼로 아웃되었는데, 그때도 1루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이것은 연출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야구가 그에게 전한 헌사이며, 전문가를 기리는 오마쥬의 모습이기도 했다.

우리는 1루 출루에 성공한 양준혁만 기억할까? 아니면 전력질주를 했는데 끝내 이르지 못한 양준혁을 기억할까? 과거 스포츠 뉴스에 금주의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보면, 출루에 아슬아슬하게 성공해 낸 양준혁이 나왔겠지만, 시간이 흘러 한국 야구사 통사를 본다면, 1루까지 달려 놓고 결국 아웃되는 (아웃될 줄을 알면서도 1루까지는 언제나 전력했던) 양준혁의 모습이 나올 것이다.


어떤 영업사원들, 어떤 직장인들은 매분기마다 전년 기록을 경신하고, 매년 상위고과를 받는다. 그리고 격년으로 승진을 한다.

이들은 열독률이 높은 글 위주로 쓰는 작가이며, 자신의 그림 대부분을 팔아 치우는 화가이며, 자신이 작사한 대부분의 노래가 금영 노래방 기계에 들어가 있는 음악가이다. 또 타석에만 들어서면 안타를 치고 1루에 안심 도착했던, 즉 양준혁이 아닌 어떤 선수이다.


이런 이들이 우리에겐 ’정상‘적인 작가로, 미술가로, 음악가로, 선수로 기억된다.

그러나 진정한 작가는 습작의 양과 주목을 받은 글의 양이 현저하게 불일치하는 작가이다. 그러한 상관관계를 평생 점점 떨어뜨리는 작가가 진정한 작가이다.

 

자신의 글이 주목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마치 페르난도 페소아보다 재능이 훨씬 뛰어나야 옳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올해 업무 실적이 예년에 미치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는 작가도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피카소나 양준혁에게 그랬던 것보다, 자신에게 훨씬 더 우호적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혹은 응당 우호적이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몇 달 전 아내와 함께 어느 미대 교수님의 작품 전시회에 다녀왔다. 그분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을 다 감상하고 나서, 나는 뜬금없는 질문을 드렸었다.

“근데 교수님, 그림은 좀 팔리나요?”


교수님이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아, 정말 안 팔려요…“


나는 화가이신 그 교수님의 표정에 담긴 편안함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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