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생각을 했다.
자발적 백수가 된 날
나는 공포에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본디 새벽 두세 시는 돼야 씻고 눕는데, 그날은
밤 열한 시에 신경 안정제 한 알을 꿀꺽 삼키고,
새벽을 꿀꺽 삼켜,
아침도 꿀꺽 삼켜, 다음날 오전 열한 시에 일어났다.
아, 그게 오늘이구나.
오늘 아침이 며칠 전처럼 느껴지는데,
한 일주일 분량의 생각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우선 지금 내게서 공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홀가분하다.
당장 내일 수업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학생 집까지 그 느려터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지 않아도 되고,
그 어머니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되고,
학생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에 속으로 짜증 내지 않아도 되고,
속으로 짜증 내는 나 자신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다음 수업 갈 생각에 벌써 기분이 짓눌리지 않아도 되고,
이 모든 걸 내일모레에도, 글피에도,
그다음 날에도 하지 않아도 된 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그저 좋아 혼자 콧구멍을 벌렁이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일요일.
작정하고 앉아서 생각하기 완벽한 시간이다.
우선 5월 한 달간 하게 될 새 업무를 정립했다.
0. 1시간 기도 및 성경 명상하기.
1. 1시간 탄천 따라 걸으며 광합성하기.
2. 일주일에 두 권 책 읽기.
3. 매일 하루 한 편씩 글 올리기.
업무다. 그리고 무휴다. 몹시 바쁠 것 같다.
그리고
어느 한 친구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친구에 대해 생각하느라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이 친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이 친구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친구는 왜 그 말을 하고 그 행동을 했을까,
나는 또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살아온 0~10세의 삶과, 11~20세의 삶과,
21~30세의 삶과, 지금까지의 삶을 재구성하고,
또 내가 살아온 그 구간의 삶을 반추해 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라 사료가 많다.
하루종일 뜯고, 붙이고, 되감고, 빨리 감고,
우로 돌리고, 좌로 돌리고, 빨간 비닐로 비춰 보고,
노란 비닐로도 비춰 보고, 확대도 해보고, 축소도 해보고서
내린 결론은 '모르겠다'와 '상관없다'이다.
한 인간이 하나의 우주라는 것은 과언이 아녔다.
하지만 몰라도 사랑할 수 있기에,
'상관있는' 것은
내가 나의 2024년 5월 5일 일요일 하루 전체를
이 한 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썼다는 것,
그 사실이 문득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며
'희망 사항'은
그 친구가 자신이 귀하지 않다고 느끼는 어느 날,
본인을 너무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이 있었음을,
굳이 그렇게 알고 싶어 할 만큼 본인이
그 사람 마음의 물낯에 근사한 파문을 일으켰음을,
그만큼 누군가에게 '이미' 중요한 사람임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정말로 그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