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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아 May 13. 2024

백수 10일 차

시집과 뚫어뻥

제목을 쓰면서 너무 놀랐다. 일을 관둔지 벌써 열흘이나 됐다고?


...


한참 내 얘기를 두서없이 떠들고 싶다. 상대의 표정, 숨소리 신경 쓰지 않고. 하품을 참고 있는 건 아닌지 살피지 않고. 자세를 뒤로 젖혔는지, 내 쪽으로 기울였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정리하려 애쓰지도 않고. 사람은 정말이지 자기가 자기의 지옥을 만든다.


며칠 전 산 시집의 첫 두 편을 읽다가 심장이 너무 뛰어서 덮었다. 매일 수능 영어 지문만 분석하다가 시가 들어오니 몸이 많이 놀란 것 같다. 그래서. 주제가 뭔데. 뭘 보여주려는 건데. 당신의 사랑이 그래서 행복하다는 건데, 슬프다는 건데. 좋다는 건데, 싫다는 건데. 그 사람 얘기야? 당신 얘기야? 하늘에서 사막으로 갔다가, 여자의 손톱으로 갔다가, 다시 하늘로. 통제가 안 된다. 한 손에 잡히지 않는다. 현기증이 났다.


....


이 집에 산지 만 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상상만 하던 큰 사건이 기어이 터졌다. 변기가 막힌 것이다. 거짓말이길 바랐다.


뚫어뻥을 사러 마트에 갔다. 아, 줄이 너무 길다. 쓰레기봉투도 사야 하는데. 셀프 계산대에서 뚫어뻥만 사고 봉투를 사러 다시 나올까? 그냥 기다릴까? 똥 마려운 사람처럼 체중을 왼쪽으로 실었다, 오른쪽으로 실었다 하며 계산대 점원분 얼굴을 봤다, 배달을 맡기네, 마네 하는 앞사람을 봤다, 셀프 계산대를 봤다, 하기를 십수 번 돌리니 내 차례가 왔다. “포인트 적립하-” “아뇨.” 계산이 끝났지만 갈등은 남아, 오른손에 뚫어뻥과 10L 쓰레기봉투 한 묶음 들고 발끝을 동동거리며 집 엘리베이터에 도착.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네 명이나 탔다. 2층. 4층. 6층. 10층.


’ 2층은 계단으로 좀 가시지.‘

2층, 땡.

닫힘 버튼.


4층, 땡.

아무도 안 내린다. 잘못 눌렸나 보다.

닫힘 버튼.


6층, 땡.

오른손에 페트병 맥주를 들고 계신 노신사 한 분이 내리신다.

닫힘 버튼에 손이 가는데-


“저기, 아가씨.”


“네?”


“그 뚫어뻥, 그거 못 써요. 그거 안 뚫려요.”


“아, 진짜요? 왜요?”


반쯤 다시 타신다.


“아, 그게 바닥이 그렇게-“


열림 버튼을 누르려다 닫힘 버튼을 눌러버렸다.

몸이 정확히 절반이 끼셨다. 너무 죄송해서 닫힘 버튼을 두 번쯤 더 누르고야 열림 버튼을 눌렀다.


“바닥이 그렇게 평평한 거는 안 뚫린다고. 바닥에 구멍이 이렇게 뚫려 있는 게 있어.“


문에 낀 상태로 어떻게 온전한 문장을 구사하시는 놀라웠다. 맥주를 왼손으로 옮기시고서 손으로 바람직한 뚫어뻥의 모양을 그려 보이신다.


“그걸 써야 뚫리지, 아가씨가 산 건 뚫리지도 않고 괜히 옷만 베린다고. “


“아, 그렇구나…”


“응. 이 아가씨 딱 보니까 지금 뭐가 막혔는데, 내가 보니 이걸 잘못 사 온 거야.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가서 환불하든지 해요.“


“아 네, 선생님.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뒤돌아 가시는 모습을 보고 열림 버튼에서 손을 뗐다. 6층.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그래. 아직은 그래도 따뜻한 세상이야. 이걸 또 어찌 그리 보시고. 오른손의 뚫어뻥 꼬옥 쥐었다. 그리고 엄습하는 불안. 환불하기엔 너무 멀리 왔는데, 진짜 안 되면 어떡하지? 저분 말대로 뚫다가 실패하고, 옷을 베리고, 돈 아깝다며 좌절하면 어쩌지? 상상을 하니 심장이 그냥-


10층, 땡.

그냥 일단 해 보자.

부리나케 뛰어 들어와 쓰레기 봉지를 소파에 내던지고 뚫어뻥의 포장을 뜯었다. 포장 뜯기 힘든 꼬락서니가 영 불길한 것이, 아무래도 노신사분 말씀대로 될 것만 같다.


심호흡을 하고, 변기를 연다.


뚫어뻥아, 뚫어라!

’뿡쑥. 뿡쑥. 뿡쑥.‘


물을 내려본다.


‘콰르르르 꿀ㄲ?’


‘콰르르르 꿱?’ 보다는 낫지만 애매하다.

그래도 낫기는 낫다. 좋다. 희망이 보인다.


‘뿡쑥. 뿡쑥-'

뚫어뻥의 컵이 뒤집혔다. 오늘치 남은 원기의 삼분의 일이 빠져나갔다. 살살 다시 뒤집어,


‘뿡쑥. 뿡쑥. 뿡쑥.’


물을 내려본다:


‘콰르르르 꿀……꺽!’


오오오!

한 번 더!


‘콰르르르 꿀……꺽!!! 헤에- 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을 보니 콧구멍이 커지고 입꼬리가 간사하게 올라갔다. 우려와 달리 큰 일 해준 우리 뚫어뻥에게 따뜻한 샤워를 선사했다.


...

한 육 년 만에 변기를 뚫고, 낮에 먹다 남은 생선가스를 데워 먹으며 이 작은 성취를 자축하는데 책상 위, 낮에 읽다 덮은 시집이 눈에 들어온다. 인생은 과연 한 편의 시구나! 아니, 시집이구나! 그런데 초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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