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가 높았고 그만큼 할 말도 많은 편
올해는 나에게 밀도가 높은 한 해였다.
계획하지도 않고 예측하지도 못한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나의 판단과 결정 안에서 나의 원칙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이 중요한 사람인지를 계속해서 점검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자신감도 생겼지만 꽤나 많은 주저함들이 쌓였다. 가지런히 정리되기는 까다롭고 두서없이 할 말이 많았던 해였다. 11월부터 백수가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놀면서 12월에는 태국에 머물렀다. 태국은 정말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고 매일 멍을 놓으며 비운 덕에 하고 싶은 말을 얼핏 정리할 수 있었다.
작년의 나의 약진이라고 한다면 나의 야망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인지하기 시작한 것, 영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의 방향을 고민한 점이다. 영향력이라는 것을 ‘내가 가진 자원을 가지고 어떤 사건과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풀었고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간다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기대는 좀 더 복잡한 결론으로 바뀌었다. 2019년 결산은 그 결론에 대한 이야기다.
“저는 강도보다 진폭이 중요한 사람이에요.”
동료와 이야기하던 중에 꺼낸 말이다. 더 큰 힘을 가지면 변화를 쉽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던 순간이었다. 내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다.
이 대화의 맥락에서 나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요’가 아닌 ‘전략으로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일의 태도’와 ‘성과를 위한 전략’은 구분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내가 전략적으로도 과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걸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나는 ‘태도’와 ‘전략’의 관계성이 중요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면서 좋은 사람이기 포기하지 않는다. 과정을 가꾸며 성과를 만든다는 태도이자 전략은 상대적으로 성공에 대한 확신을 주기 어렵다. 누구를 다치게 하지 않고도 멋진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해도 설득이 어려울 때도 많았다. 회사 안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어리고 경험이 적다 보니 초라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일을 낭만적으로 보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고, 나이브한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도 했다. 그렇다고 바꿀 수 있는 종류의 결은 아니었다. 내가 믿는 일하는 방식과 리더십을 믿기로 했다. 나는 동물적인 감각이 좋은 편이니까. 당장의 초라한 마음에 옳다고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더 선명하게 다듬고 싶었다. 모호한 상태에서도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좋은 동료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확신이었다.
태도와 전략이 마치 다른 것인 마냥 전략 안에 태도를 삭제하는 것이 나의 세계에서는 결코 프로페셔널이 아니다. 태도가 전략이 된다고 해서 나이브하거나 잘하기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나의 경험 안에서 ‘태도’적인 ‘전략’을 단단하게 만들고 싶다.
나에게 ‘성공 경험’은 결과의 크기를 가장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태도와 전략을 균형 있게 고민하며 동시에 결과의 크기를 크게 만드는 일이다. 때로는 이 균형의 복잡함 때문에 결과의 크기가 좀 더 작게 나온다고 해도 나와 내 동년배들이 기대하는 성공 경험은 '크기만의 성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머문 공간이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영향력을 쌓았다. 영향력을 확장하다 보면 힘이 생긴다고 생각했고 그 힘을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고 싶었다. 기대와 달리 영향력은 공감과 설득으로 확장될 수 있다면 힘은 조직의 승인이 필요했다. 조직의 승인 없이는 영향력을 확장한다고 힘이 덩달아 딸려오지 않는다. 반대로 힘이 생긴다고 해서 영향력이 덩달아 생기지 않더라.
힘과 영향력, 이 각각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다른데 나는 종종 헷갈렸다. 힘을 통해 해결해야 할 때 영향력에 집착했고 영향력이 힘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해서 의미 없는 일로 여기기도 했다. 힘과 영향력은 다른 성질로 이해하면서 다루고 고민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내린 의사결정은 내 기대와 다르게 흘렀다.
힘과 영향력을 명확히 구분하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힘인지 아니면 영향력인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힘이라고 해서 불편하게 여길 일이 아니라 획득한 힘을 통해 쌓고 싶은 영향력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 쌓이는 힘과 영향력을 대단히 여길 필요도 없이.
이를 알진 못한 채 갖은 애를 썼다는 게 안쓰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격려하고 싶은 일은 풍경을 만들 수 없는 순간에 장면에 집중했던 거다. 나에게 풍경을 전환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걸 인정했고 좋은 장면을 잘 만들어내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찰나라고 해도 성심을 다해 근사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었다. 알면서도 꾸준히 애를 쓸 때마다 나는 나에게 고마웠다.
그 이상을 기대하면서부터는 막연히 낙관을 하기 어려웠다. 힘의 한계를 영향력의 낙관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정확히 한계와 가능성을 구분해서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정확히 헤아릴 필요가 있다.
어떤 힘,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싶은지, 힘을 어떻게 발휘하고 싶은지, 영향력을 어떤 방향으로 활용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나는 아주 힘이 커지거나 영향력이 커지는데 감화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 이상하게도 세상이 좀 우습고 시시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시시한 마음을 의아해하면서도 많은 것들을 빈정대며 바라보고 단언하기도 했다. 평생을 이러고 살 수는 없고. 이 마음을 멀리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향력의 종류와 내용(혹은 목적)을 구체적으로 선명도를 높이고 '그것'을 위한 힘을 확장하며 영향력을 키우는 접근이지 않을까, 지금은 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스스로를 관찰하고 싶은 마음에 가능한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려고 한다. 많이 읽고 보는 편이다.
힘과 영향력의 내용과 방향을 생각하다 보니 정확하지 않은 곳에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을 다하면서 일하는데 그게 엉뚱한 곳이라고 한다면 아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다. 힘과 영향력의 한계 사이에서 고민이 많기도 했다. 결정을 하고도 원하는 게 맞았는지 의심하고 괴롭기도 했다.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해결하고 싶은 문제도 있었다.
그즈음에 휴가를 가서 많이 걷던 중에, 어떤 결정을 위해서는 항상 논리적으로 하나의 답이 모이지 않는 순간도 있는 법이고 마음의 우선순위를 가지런히 하고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운 마음이 드는 이유와 확신을 가지던 마음의 이유는 분명하게 달랐다. 어떤 기준이 나에게 더 중요한지를 살폈고 마음이 편해졌다. 괴롭고 후회되는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래서 이런 마음이 드는구나' 인정하고 나니 자유로워졌다.
종종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어떤 성취감, 사명감, 책임감 같은 것에 몰입되어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의 우선순위는 살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마음의 감각을 꺼두거나 계속 나아가는 것 자체만을 위해 스스로 설득하는데 힘을 들였다. 그 동력을 멈추고 한 힘든 결정이었지만 ‘안 한다’는 결정도 중요하고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나에게 없던 경험을 얻었다.
힘과 영향력을 헤아리다 보니 일이 그저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나에게 항상 성장하고 싶다는 건 더 유능해지는 거였다. 항상 더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았고 이동했다. 그건 더 어려운 문제들이 있고 해결할 줄 알게 되는 뜻이기도 했다.
더 성장할 수 있는 환경들에 나를 계속해서 두어보니 일은 할 줄 알고 나면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쉽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더 어려운 문제면 더 많은 역량을 요구하겠지만 어느 지점 부터 얼마나 더 잘하고 더 훌륭하게 해낼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함께 하는 동료가 중요하고 운도 정말 중요하다. 혼자만의 유능감이 빼어나진 다고 어려운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성장하고 싶은 향상심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더 유능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유능함의 기준이라는 게 도달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항상 ‘더’에 집중하는 사람일 테니까 만족을 못할 거다. 혼자서 해낼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 시작하면 난이도는 더 높아진다. 어려운 걸 알고도 하고 싶은 마음 안에서 유능해지고 싶다. 더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것을 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스스로 잘 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흥미로운 일의 주제와 더 잘 해내고 싶은 일의 속성은 알겠는데 일의 형태로는 무엇이 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든 '오랫동안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좋겠다. 당장 찾으면 좋겠지만 어렵겠지. 게다가 지금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정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계속 더 놀려고 한다.
2020년은 예측 불가능함 속의 구체성을 믿고 기대어 본다. 어떤 것도 기대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아도 내가 나여서 할 수밖에 없고, 만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만 기대하는 2020년이다.
올해 회사 안과 밖에서 소중하게 들은 말 몇 가지를 기록한다. 연말 결산이니까 좋은 말 밖에 없다. 우하하. 나는 나에게 대해 잘 아는 것 같다가도 많은 부분을 의심하는데 이 이야기 덕분에 나를 좀 더 믿게 되었다.
다 적지 않았지만 내 메모 앱에 더 많은 말들이 저장되어 있다. 나에게 귀한 말을 해준 분들에게 고맙다. 나는 말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다. 말에 잘 귀 기울이고, 정성껏 담고, 적당한 말만 하고 싶다.
/ 몰입력과 설득력이 높은 사람. 어떤 일을 해도 일과 내가 주고받는 의미를 이해하고 깊게 몰입하고는 그걸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해내는 사람. 자신이 몰입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항상 일에 끌려가지 않고 주변 사람들도 일을 다르게 보게 하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
/ 실력이 뛰어난 디자이너처럼 일하는 사람. 어떤 부지에서 살지, 어떤 집을 지을지 막연한 채로 이야기하면 ‘당신은 이런 동네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는군요’라고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사람. 일의 과정과 내용을 정렬하고 의미를 연결하는데 탁월한 사람.
/ 발견하고 이야기해주는 발견자. 사랑이 많고 끈기도 높고 공간을 밝혀주는 사람.
/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하는 사람. 역할을 늘리는 방식보다는 책임과 권한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일했으면.
올해 동리 씨와 나는 5주년이 되었다. 나는 5주년이 되었다는 커플을 보면 오래된 듯하면서도 얼마 안 된 것 같다는 어중간함을 생각했는데 그 시간에 우리가 딱 서있게 되었다. 그래도 반십년이라고 하면 엄청 길게 느껴진다.
시간의 속도만큼 우리가 연인인 게 의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주 보고 밥을 먹다가,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를 하다가, 손 잡고 걷다가 나는 불쑥불쑥 동리 씨에게 묻는다. 우리가 연인이 되어서 이렇게 함께 시간을 쌓아간다는 게 신기하지 않으냐고.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냐고. 처음 미팅 장소에서 일로 마주할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선택된 가족이 아닌, 내가 처음 가족과 같은 관계로 선택한 사람. 어쩌다가, 어떻게, 이렇게. 정말 신기한 일이다. 항상 같은 마음이 담긴 눈으로, 다정한 말을 늘 새롭게 하면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나를 그대로 궁금해하고 좋아하고 기대해주는 사람과 서로 같은 마음인 것도 신기하다. 시간과 비례하면서. 항상 곁이 되어주는 동리 씨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2019년의 마지막 날에는 가족들과 둘러앉아 한 해를 함께 회고했다. 나는 이 곳에 적은 이야기를 했고 서로에게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작년은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결정이 있던 해였고 올해는 각자의 전환이 있다. 엄마가 회고하던 그 시간이 참 좋았다고 2020년에도 자주 이렇게 이야기 나누며 서로에게 지지가 되자고 이야기했다.
당연하지 않은 관계의 행운과 꾸준히 애쓰는 마음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