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 나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다네
2017년부터 한 해 결산을 하면서 연말에는 항상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해석하며 그 다음 해를 꾸렸다. 그 다음 해에 대한 계획은 대부분 어떤 결핍에서 출발했다. 매순간 방향성을 쥐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덕분에 확장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올해는 어떤 결핍에서만 출발하는 것으로는 충분할 것 같지 않았다.
무소속으로 일 년을 놀아봐도 좋겠다는 마음만으로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보다 무엇에 더 집중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미리 정해두지 않았을 때에 나에게 다가올 우연이 궁금하기도 했다. 근사한 우연들 덕분에 예상하지 못한 기회를 얻었고, 애틋한 성취가 많았고, 전환이 잦았다. 대뜸 해보기도 했고 어쩔수 없이 해야 하기도 했다. 내가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이해했고 잘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명료하게 발견했다. 앞으로 해나 갈 일에 대해 결심했고 2021년에는 동료들과 그 일을 잘해내고 싶다.
아마 평소였다면 위의 한 문단을 더 길게 풀어 썼을 거다. 보통 한 해 결산을 할 때면 가라 앉은 장면과 생각들의 조각을 맞추고 의미를 발견하며 글로 지었다. 올해도 경험의 재료들이 많았고 각각의 의미들이 무엇인지도 아는데 정작 가라 앉지를 않았다. 이후에 내가 보면 도움이 될 거란 걸 아니까 써보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애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 장면들과 생각들이 여러모로 나를 바꾸었고 역할을 다 했다. 이럴 때도 있는 거지.
2021년에는 지겨운 마음을 다루고 싶다. 올해 가장 자주 들었던 감정은 지겨움이었다. 화가 날 때도, 실망할 때도, 절망할 때도, 낙관할 때도, 재밌을 때도, 몰입할 때도, 쉬어갈 때도 자주 지겨워졌다. 올해의 전환도 대부분 이 감정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면서 만들어졌다. 유독 한 해 결산이 안 써지는 이유도 삶을 포트폴리오처럼 구성하며 여러 스펙트럼에서 분석하고 통제하는 내가 지겨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종종 누군가 불안해질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으면 '마음 속으로 근사한 진열장을 떠올리고 그 위에 불안을 올려둔 다음 구체적으로 관찰하며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해결하고 그게 어려우면 좋아하는 시간을 가지고 흘러 보낸다'고 답한다. 지겨움도 이 방법대로 다뤄보려고 했지만 진열장에도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럴 의욕이 안 생겼다. 그럴 때면 가끔 2015년에 메모해둔 백승욱 교수님 <사회 변동과 미래 사회> 수업 마지막 날 인사를 꺼내 읽었다.
격동의 시대를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다리를 어디에 딛고 설 것인지 이 변화는 긴지 짧은지 알아야 한다. 세계에 돌파구가 없는 게 아니다. 미리 많은 것을 포기하지 말고 위기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길 바란다. 수동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물결 속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다보면 많은 것이 보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또한 읽을 수 있다. 이 수업이 사회 변동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작은 지침이 되길 바란다.
'아, 다 모르겠고 지겹다'라는 생각이 들 때면 지금 어디에 딛고 서 있고, 어디에 딛고 서 있고 싶은지 나에게 질문했다. 누구와 함께 하고 싶고 어떤 장면을 만나고 싶은지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순간에는 태도가 되었고, 또 어떤 순간에는 기준이, 우선순위가 되어주었다.
지겨운 마음 대신 너그럽고 유연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고 싶다. 올해 만난 동료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배운 덕분이다. 화내거나 답답해 하는 마음은 대부분 좋은 연료가 되어 주었지만 더 자주 지겹게 만들었다. 너그럽고 유연하게 바라보며 계속 더 기대해보고 싶다.
무소속, 코로나, 수술을 지나오며 어느 때보다 나와 보낸 시간이 많았고 한 해 동안 나와 잘 보내준 나에게 고맙다. 내년에는 새로운 변화가 많아 같이할 시간이 올해만큼 충분하지 않겠지만 몸 건강히 솔직하고 다정하게 잘 지내야지. 무엇보다 힘든 시간을 견뎌온 모든 사람들이 평온해지길 바란다. 저절로 그럴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만큼 몸과 마음을 보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