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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민 Dec 30. 2022

2016년 결산

옮겨온 결산

16.06.18 - 상반기 결산


7차 학기도 끝나간다. 월요일에 시험이 하나 남았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해줄거니까 한 학기 소회를 미리 정리하려고 한다. 언제 졸업하냐고 그렇게 한탄했는데 막상 4학년이 되니 기분이 이상하다. 경계에 서있는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경계에 선 삶을 1년 넘게 해왔는데도 4학년이 되니 기분이 또 다른 건 어쩔 수 없나부다.


이번 학기에는 사회학 두 개(가족사회학, 현대사회학연구)와 심리학(사회심리학), 국어국문(영상서사론), 신문방송(비판커뮤니케이션), 창업학(사회적가치와 소셜벤처) 전공수업을 각 한 개씩 들었다. 우연히 한 과목을 제외하고 교수님이 다 여성이었다. 당신이 공부하는 학문을 흥미로워하고 재미있어 하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배우는 기분이었고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해가 지날 수록 앞선 삶을 사는 여성에게 많은 감정이 생긴다. 엄마에게, 할머니에게, 교수님에게, 일로 만난 다른 기관의 담당자에게.


수업도 다 내가 하고 싶었던, 나에게 필요했던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맞닿아 있는 고민들이 많아서인지 유독 공부가 즐거웠다. 수업 시간에 끄덕이다 보면 다른 상상이나 질문에 닿아있기도 했고,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배움이 몸에 스윽 스미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시험 기간은 싫다.) 시험 문제를 보고도 ‘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다니’ 하면서 흥분했다. (그래도 시험은 싫다.) 나도 이런 내가 낯설어서 이런게 4학년의 무엇인가, 나의 길은 대학원인가 잠시 착각하기도 했다. 과제와 팀플도 이런게 4학년의 무엇인가, 싶을 정도로 정말 많았다. 팀플 네 개에 과제는 평균 일주일에 두세개씩은 꼭 있었다.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지만 의미없는 것은 없어서 다 쌓이고 스미는 기분이다.


이제 6학점만 남아서 이번 학기에 모든 졸업 요건을 채우고 싶어 학기 초엔 토익 시험을 봤고 중간 고사 이후에는 졸업 논문도 썼다. 한 번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지만 졸업 논문의 주제를 잡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사회학에서 배운 걸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주제이면서 내가 보낸 시간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고등학교 졸업 때 동아리에서 쓴 논문 주제는 내가 그 시절에 가장 열중했던 청소년인권운동과 맞닿아있었고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해 위즈돔에서 했던 일을 남기기로 했다. 욕심이 큰 바람에 많이 허우적댔는데 백교수님이 기획자의 관점이 아닌 사회학도의 관점으로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도록 많이 도와주셨다. 제한된 시간이 너무 짧았고 과제와 일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더 많은 정성을 들이지 못해 아쉽지만 <‘프로젝트화된 삶’ 안에서의 ‘자기기획’: ‘사람-책 되기’ 툴킷 워크숍 참여자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논문을 완성했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내 삶의 방식과 내가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었다.


백교수님은 완성에 가까워진 논문을 보시곤 ‘훌륭하네. 네가 봐도 뿌듯하지 않니? 앞으로도 주변을 관찰하고 분석하다 보면 많은 배움이 될거다’ 라고 격려해주셨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연구실에서 나오는데 존경하는 선생님과 과정을 함께 나누고 결과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따뜻한 격려의 말에 감동해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님도 나의 여러 번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진해 열성적으로 교정교열을 보고 피드백도 주었다. 긴장하며 반응을 묻는 내게 ‘고맙더라’고 하셨다. 내가 사랑하는 학문을 부모님과 공유할 수 있어 행복해 또 눈물이 찔끔. 과정이 귀했던 만큼 사회학을 만나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회학이라는 학문과 사회학과라는 공간 덕분에 얻고 채운 것이 너무나도 많다. 떠나기 싫다. 흑흑.


복학을 하고나서 매학기가 끝날 때마다 이렇게 글을 남겼다. 첫 학기에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내 중심을 잘 잡기 위해 애썼고, 두 번째 학기엔 중심을 잡는데 조금은 익숙해져 보다 사회 흐름 속에 발 딛고 살아겠다고 결심했다. 꽤 오랜 시간 다양한 세계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았고, 나를 지킬 수 있는 세계만을 만났다. 이번 학기엔 내가 어떤 세계에 발딛고 살아가고 싶은지,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질문을 얻었고 그 질문에 답을 구하는 시간을 보냈다.


많은 결정을 해야했고 쉽지 않았지만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 들뜬다. 어떤 답을 찾던 내가 배운 학문에 부끄러움이 되기 보다 내가 배운 학문으로 지지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 8차 학기는 그 질문의 답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해야겠다.



2017.01.07 - 하반기 결산


2016년의 마지막 날, 쌓아둔 잠을 몰아내고 나니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 날 떡국을 먹으면서 어쩐지 더 잘 정리하고 싶은 해였는데 그러질 못했다고 이야기하니 엄마가 그럼 너는 아직 2016년을 안보냈다고 생각하면 되지, 라고 답했다. 역시 현명한 우리 엄마. 어쩜 그렇게 훌륭하시죠? 얼떨결에 끝나버린 2016년을 12월 38일이 되어서야 보내려 한다.


“무엇을 하겠다고 정해두고 그것을 하기 위해 만나 그것만 잘했다면 이렇게 재밌는 일들이 일어날 수 없었겠다”


2016년 특히 하반기에는 내가 오랜 시간 쥐고 있던 커뮤니티, 관계라는 단어를 강렬하게 경험하고 정리한 시간이었다. 가을의 제주에서 100여명의 사회혁신가가 모여 2박 3일동안 함께 했던 언컨퍼런스 <Inspired 2016>과 새로운 집회 시위를 시도하는 프로젝트 <해보지, 뭐.>가 그랬다.


구체적인 장면과 사람, 이야기에 받은 영감과 감동을 되새기면서 얻은 인사이트는 “어떤 경험을 나누고 싶은지 먼저 상상하고 나면 (어떤 목표나 결과를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 그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거나 모을 수 있고, 그 다음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는 거였다. <Inspired 2016>은 잘 쉬고 놀면서 각자가 가진 고민이나 영감을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상상했고 <해보지, 뭐.>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정치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해볼 수 있는 시도를 함께 경험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경험에 끌리고, 그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기획된/예측된 시간 이후로도 관계는 이어졌다. <Inspired 2016>의 사람들은 제주에서 돌아와 가까운 동네에서 만나 자신이 가진 재주를 나누고, 함께 해외 여행을 가거나 협업의 기회를 만들기도 하고, 연말을 보내는 등 다양한 만남을 만들었다. <해보지, 뭐.> 사람들과도 어제 신년회를 하다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실험 아이디어가 툭 나왔고 이야기가 쌓이면서 함께 해보기로 했다.


처음 사람들이 모였을 때 우리가 이런 실험까지 하게 될 줄은 단연 몰랐고 나에게선 나올 수 없는 재밌는 상상이라서 함께 할 기회를 얻은게 고마웠다. 길게 알아온 사이도 아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같은 사건을 경험했다는 거였다. 그 경험을 함께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을 함께 나누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들이고. “무엇을 하겠다고 정해두고 그것을 하기 위해 만나 그것만 잘했다면 이렇게 재밌는 일들이 일어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관계는 당장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지속적인 마주침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할 것인지 (효율성이 아닌) 효과성에 집중해야 하는 것”


대체 이 사건들은 무어라 설명할 수 있는건가, 하던 찰나에 책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을 함께 읽고 글을 쓰는 리딩클럽이 큰 도움을 주었다. 여러 질문과 함께 ‘관계의 무상성’이라는 단어를 얻었다. 책에 나온 설명과 내가 한 경험들, 리딩클럽에서 나눴던 대화들을 바탕으로 나는 그 단어를 “관계는 당장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지속적인 마주침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할 것인지 (효율성이 아닌) 효과성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가 그 다음에 무엇을 만들지는 모르는 일이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나면 그제서야 그 관계가 그 일의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결정된 채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무상성’이 허용되는 틈을 만들기 위해선 삶의 안전망이 필요하고 난 그 안전망을 만드는데 보태고 싶다.


모호했던 감각들이 언어로 정리되니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해야 하는지 명쾌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게 남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모호한 채로 두기로 했다. 커뮤니티와 관계에 답을 정해두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지만 모호한 것을 모호하게 그대로 두는 것이 때로는 더 명쾌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다. (왜 나는 모든 걸 다 설명하고 싶어하는 욕심을 못버리나.)


2017년은 나에게 중요한 해다. 경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더 독립하게 될 테고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시도를 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말로 떠들던 것들을 실제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a.k.a 창업)


두려움과 불안, 불확실함이 앞서는 한 해를 마주하며 올해 목표는 하는 걸로 삼았다. 2016년을 돌아보면 잘 해내기 위해 애썼다. 학업과 일 사이에서 잘 해내고 싶었고, 모든 프로젝트를 잘 해내고 싶었고, 모든 선택을 잘 해내고 책임 지는 것도 잘 해내고 싶었다. 잘 해냈는 지도 모르겠지만 ‘잘’에만 집중하다 보니 어쩐지 어긋나지 않는데 전전긍긍하느라 넓게 보지 못한 듯 하다. ‘잘해내는 것’이 아닌 ‘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날은 재밌게 하고, 어느 날은 엉뚱하게도 하고, 어느 날은 묵직하게도 하게 되겠지. 그러다 운이 좋으면 내가 스스로 가두는 한계도 넘어보고 우연히 새로운 상상도 닿지 않을까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2016년 한 해는 내가 여성임을 가장 많이 자각한 한 해였다. 20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가장 많은 공포와 좌절을 느꼈지만 그런 순간마다 수많은 보이는/보이지 않는 여성에게 큰 위로와 힘(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받았다. 가장 약해지는 순간 힘을 준 사람들이다. 올해도 내가 20대 여성임을 힘주어 자각하며 나에게 위안을 준 여성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드디어 1월 7일 ٩(๑❛ᴗ❛๑)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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