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건너온 ‘오타쿠’가 우리만의 개념과 문화로 안착하고 있다. 영상문화와 온라인 네트워크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오타쿠적인 매니아 취미를 가지거나 상호간에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고 소개되면서 오타쿠는 점차 사회적, 문화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간의 특정 범주화가 된 것 같다.
과거 일본에서의 오타쿠는 ‘가상세계’라는 현실이 아닌 세상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세계관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이야말로 그 안에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덕목인 ‘기능성’과 ‘현금화’를 비판하거나 거부하여 은둔의 형태로 자신만의 유토피아 세계관을 상상하고 스스로를 몰입시켰다. 현실로부터 소외되는 ‘주변인’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규칙이나 규범, 방식으로부터 도태되는 존재론적 불안감으로 스스로를 자폐화시키거나 반체제화시켰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들의 인식속에서 오타쿠는 비현실적이고 부적응자가 되었다. (물론 이들의 사유들은 구체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일본 역사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만화에 나오는 세계관들과 주인공들의 모습들은 전후 일본과 당시 사춘기 시기를 겪었던 청소년들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타쿠는 변태나 잠재적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일본에서의 미야자키 츠토무의 연쇄 유아 납치살인사건(1988-1989)과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살포사건(1995)은 이들을 부정적 존재자로 확신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낙인 찍고 배제하게 된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 이들을 선제적으로 거부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나라 안에서 오타쿠의 범주나 개념은 변형되었다. 한국에서 호명되고 있는 오타쿠의 변형인 ‘덕후’는 일본과는 좀 다른 범위를 갖는데, "일본에서의 오타쿠 문화가 대중문화와 차별화되어 규모가 점점 커진 느낌이라면, 한국은 대중문화에 서서히 녹아간다는 느낌”이다. 화성인바이러스에서 소개된 ‘오덕페이트’의 충격을 넘어 ‘능력자들,’ ’마이리틀텔레비전’등에 나온 덕후에 대한 인식은 ‘사회성 결여’보다는 취미에 대한 다양성과 문화향유를 위해 참고할만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측면이 생겼다. 일본 ‘오타쿠’를 상징하는 대명사인 ‘세카이계(セカイ系)’ 나 ‘모에(萌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오타쿠 계열과 더불어 ‘무언가를 전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또 다른 카테고리가 우리나라에서는 만들어졌다. LP판을 모으는 사람들, 자동차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 맛집 덕후, 책덕후, 디즈니덕후, 장난감덕후, 과학덕후, 동물덕후, 정치덕후 등 다양한 분야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덕후라 지칭하면서 덕밍아웃중이다.
덕후들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결정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과 주류 집단이 가지지 못한 새로운 사고방식이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주변인으로 포지셔닝 하고 있다. 특히 덕후가 전문가적 마니아로 인식되는 중요한 계기는 '온라인 플랫폼'이다. 유튜브는 기존 미디어들을 압도하고 있다. ‘좋아요’와 ‘구독’은 인기와 명성이고 현금이다.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덕후들은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컬렉션과 지식들을 공유하고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통신망으로 연결돼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개방적 연대가 가능해졌다. 덕후들은 어느샌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양성의 원천이 되가고 있다.
아직 한국내 오타쿠의 문화가 양지로 탈바꿈된 것은 아니다. 한국 덕후의 개념은 구분이 모호하긴 하지만 ‘오덕’과 ‘십덕(혼모노라고도 지칭된다.)’으로 분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십덕은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등의 영상문화들에 광적으로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주로 사용된다. 이들은 ‘안여돼(안경쓴 여드름 돼지)’나 ‘안여멸(안경쓴 여드름 멸치)’인 루저로 묘사되고, 때로는 한심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전문서적을 통해 소개되고, 이들의 취향 존중을 말하고 있지만 인식론적으로 이들은 불쾌한 것, 위험한 것, 인정받지 못하는 주변인이다. 이렇게 양가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오타쿠류의 대상들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떠돌며 우리 주변에 있으나 없는 존재가 된다.
2016년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올해의 단어를 ‘포스트-진실(post-truth)’로 선정하였다. 포스트-진실은 “정서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에의 호소가 객관적 사실보다 여론을 형성하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 을 가리킨다. 이는 바야하로 객관적 사실보다 해석된 사실이 더 와닿으며, 정서적이고 개인의 믿음에 근거한 다수의 진실들이 공명하는 시대에 와있음을 역설한다. 유튜브에서는 수많은 개인 채널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가치들을 설파하면서 자신과 유대를 쌓기를 호소하고 있다. 무수한 정보와 지식, 예견과 의견들이 온라인 플랫폼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오늘은 사이버스페이스 컬처를 넘어 '컬처정치'의 시대로 허물을 벗고 있는 중이다.
문화소비자들은 오타쿠에 관한 많은 객관적이거나 해석된 사실들을 접하고 다수 버전의 진실들을 만난다. 그것들이 오타쿠에 호의적이건 혐오적이건 우리는 이를 통해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들을 만들고 정서적으로 어떤 믿음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믿음들이 모여 조직이 되고 권력이 되어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선동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우리들은 다시한번 이들의 선동에 공모할 것인지 권태로울 것인지, 소비와 불매 사이에 놓이게 될것이고 이 결정들은 다시한번 오타쿠의 문화를 정의해 갈 것이다. 우리는 문화를 동질적인 단위로 사유하는 방식은 문화를 고착화하고 내부의 차이와 다양성을 억압함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양가적인 진실에 놓여있는 오타쿠의 이미지를 어떻게 업데이트 할지 오타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