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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Jan 21. 2018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부치지 않을 편지

저번에 부쳐준 김 잘먹었어 맛있더라..광천 김


몇 년 만에 밥솥을 켰어.

비밀이지만, 수화기 너머로 잘 해먹고 있다고 말한 건 다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에 벌이라도 받듯이 병이 났어. 병이 잘 낫지 않았어. 환자라는 다른 이름을 얻어보았고, 내 병에 대한 사실과 사회적 은유들을 짚어보았어. 슬퍼졌어. 우리 세상은 죽음을 삶에서 격리하듯 병 또한 정상적 생애에서 철저하게 격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당연하게 살아오던 세상에서 갑자기 문제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반성하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밥솥을 켰어.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나버린 쌀을 버리고 10가지 곡식이 섞여 있다는 잡곡 1kg를 새로 사서 밥을 했어. 엄마가 매일 아침 다른 국을 끓여주던 정성이 다시금 놀라워서 눈물이 났어. 채소를 구워서 살기 위해 입속으로 밀어넣었어. 맛있게 만들었지만 맛없게 먹었어. 혼자서 잘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만큼 씩씩하지 못했어. 그래도 밥솥을 다시 켰으니까 반쯤은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었어. 이제라도 잘했다고 이제부터 잘될 거라고 안아줬으면 했어. 몇 달 전 일이야. 그랬어.

엄마한텐 이 얘길 전부 다 비밀로 하기로 결정했어. 일단 내 밥솥은 그때 이후로도 계속 아주 잘 굴러가고 있고 나는 이제 내 몸을 충분히 걱정하고 책임지는 어른이 됐다고 느끼거든. 이제 정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삼시 세끼 골고루 챙겨먹고 영양제도 사먹는다. 술도 확 끊어버렸어. 살고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늙어가는 몸을 긴 시간동안 이고지고 살아가는 게 문제란 걸 알게 됐거든. 그리고 사는 게 이렇게 거지같은 만큼이나 나는 내 삶을 걱정하고 좋아하거든. 그래서 모든 게 처음부터 괜찮았던 것처럼 다 비밀로 하기로 했어. 

있잖아 그냥 같은 끈끈이에 붙어버린 파리들처럼 옆에서 응원하면서 살자 우리. 피차 힘들고 피곤하고 위태로운 거 다 알잖아.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그걸 알 만큼 이렇게나 장하게 컷잖아. 그리고 저번에 보내준 김 잘 먹고 있어. 오늘 점심에도 먹었다. 맛있더라. 사랑해 엄마. 이거 다 비밀이야! 그럼 안녕. 


_고장난 딸내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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