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작지만 위대한 이야기,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우리가 직장에 다니는 이유에 대한 고찰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보고 집에 돌아온 그날 밤, 책장에 꽂힌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을 다시 빼들었다. 두 시간 정도 아무 생각 없이 토익 정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삼진 그룹 여직원들의 모습을 깔깔거리며 지켜볼 요량으로 갔다가, 나는 왜사는 걸까? 와 같은 테스 형도 함부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한가득 안고 나왔다.

영화 속 무례한 누군가는 삼진 그룹 계약직 여직원들이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가 매우 '싸며'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말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일을 하는 이유를 물으며 어제보다 나은 삶을 꿈꾸고 노력하는 이들은 작지만 위대한 존재들이다.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은 단순히 승진을 위해 토익공부에 올인하는 삼진 그룹 직원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이 왜 토익공부를 해야 하는지,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매일 아침 남자 상사들의 커피를 취향에 맞게 타야 하는 삼진 그룹 여직원들


삼진 그룹 입사 8년 차인 자영(고아성 분), 유나(이솜 분), 보람(박혜수 분). 믹스커피가 전무한 시절 커피 프림 설탕의 비율을 상사의 취향에 맞게 기가 막히게 타는 것부터 팩스 보내기, 룸살롱 회식 영수증 처리하기, 담배심부름 등 사무실 업무 전반을 책임지고 있지만 고졸이라는 이유로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숭고한 노력과 노동의 가치는 매번 평가절하된다.

그들보다 능력이 없음에도 남자 후배는 남자라는 이유로 바로 승진을 하고 또 다르 누군가는 삼진 그룹에 대한 애정이 없음에도 대졸이라는 이유로 부장이 참석하는 마케팅 회의에서 억지로 의견을 개진하지만 아무도 이를  '차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두가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자영을 비롯한 삼진 그룹의 여직원들은 불합리한 일상에 무작정 순응을 하거나 무기력하게만 머물지 않는다. 사회와 회사가 마음대로 그은 선 안 쪽에 위치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가고 동시에 선 밖의 새로운 '일'에 대한 희망 역시 놓지 않는다.


토익학원 새벽반에 다니며 토익공부에 매진하는 삼진 그룹 여직원들


특히 자영을 비롯한 삼진 그룹 여직원들에게 '토익 점수 600점'은 단순히 자기만족이나 보여주기 식의 자기 계발이 아닌 선 밖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일이기에 '생존'만큼 절박할 수밖에 없다.

회사가 원래 공지했던 것처럼 600점을 받으면 남녀불문 모두를 대리로 승진을 지켜주는지 혹은 애당초 600점 받기가 어려울 거라 생각한 회사가 선심 쓰듯 제시한 기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되었든 토익 600점이 되면 삼진 그룹 여직원들에게 붙여진 '고졸 여성 비정규직'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떼 버릴 수 있다.  

토익학원 새벽반에서 매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지루한 영어 속담을 외우고 또 외우며 외국인 선생님과 동기 모두가 다 같이 매일 외치는 말처럼 그들은 매일매일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꿈꾼다.


"I can do it, You can do it, We can do it TOEIC!' 


자신의 회사 '삼진'의 잘못을 알게 되고 이를 고치려 노력하는 비정규직 여직원 자영(고아성 분)


삼진 그룹 여직원들이 토익 600점 맞기까지의 눈물겨운 도전기가 보일 줄 알았던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이 반전 아닌 반전을 맞게 되는 건 회사가 불법으로 인근 마을로 공장폐수를 흘려보내고 이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영이 우연히 알게 되면서이다. 문제를 인지한 후 자영은 바로 자신의 상사에게 폐수 문제가 보고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마저도 자영은 직접 보고도 할 수 없어 어리바리한 남자 후배에게 떠먹여 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영은 글로벌 삼진의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회사 삼진이 폐수 문제를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 해결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착오 혹은 실수에 의한 것인 줄 알았던 공장폐수 방출이 계획적이었으며 그 마저도 거짓과 조작으로 은폐하려는 회사에 자영은 절망하고 동료들과 함께 이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토익 600점을 맞아 대리가 되겠다는 조금은 세속적인 욕망은 자영의 일상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애당초 자영을 비롯해 자영의 삼진 그룹 동기들은 '성공'을 하겠다는 원초적인 욕망보다는 자신의 터전이자 글로벌 기업인 삼진에서 삼진에 걸맞은 '성장'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순간 영화에서 '토익공부'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에 다니고 있는 삼진 그룹 여직원들만이 남는다. 대신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 회사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흥미진진한 투쟁으로 채워진다.


'연대'의 힘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회사를 위해 내부고발자를 자처하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직원들의 모습이 단순히 젊은 날의 호기로움 혹은 철없음으로 비치지 않는 것은 나 역시 시대는 다르지만 회사에 다니며 조금은 나은 오늘과 내일을 꿈꾸는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에서 일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생계'이고 매번 마음속으로 사표를 쓰다가 월급날 사이버 머니가 입금되면 조용히 접어두는 것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조금은 의미 있고 사회에 쓸모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영화가 좋았던 수십수백 가지 이유 중 하나를 꼽자면,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에 다니는 수많은 작은 존재들이 힘을 합쳐 '연대'하여 다 같이 위대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점이다. 불필요한 여자 직원들 사이의 시기나 경쟁 질투가 없어서 좋았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상대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그들의 행동이 눈물 날 정도로 많은 위로가 되었다.


마이 드림 이즈 커리어우먼


70년대생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사람들과 80년대생 김지영 그리고 현재 사회초년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90년대생 누군가를 위한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그래서 그 사이 뭐가 달라졌는데?'라는 절망적인 질문 역시 반드시 필요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고 우리가 적어도 '돈'만을 위해 일하는 존재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너무 절망하지 말자, 세상이 우리를 하찮게 보고 우리의 생각을 마음대로 왜곡하더라도 힘을 합쳐 어제보다 조금 성장한 오늘을 만들어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마이 드림 이즈 커리어우먼"




  

매거진의 이전글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광기, 영화 <디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