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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송 May 29. 2021

한형모의 <돼지꿈>(1961).

당신은 모를 한국고전영화 #3

  한형모 감독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정말 세련됐다. 한국고전영화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들 중 하나를 한형모 감독의 영화로 하고 싶을 정도다. 1940년대부터 최인규 감독의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했던 한형모 감독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혼란스러웠던 한국영화계를 관통했던 인물이었다. 이 글에서 다룰 <돼지꿈> 이전에 한형모 감독은 1954년 <운명의 손>으로 한국영화 최초로 키스신을 연출한 감독이었으며,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당시엔 금기시했던 유부녀의 외도를 다룬 <자유부인>을 연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파격적인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한형모 감독의 영화들에서는 시대를 타지 않는 초월성이 느껴진다.

  친일 영화에서부터 반공 영화까지 참여했던 한형모 감독이 1961년에 연출한 <돼지꿈>에서는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담겨있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감상했다. 한형모 감독은 <돼지꿈>에서 이데올로기 없이 당시 한국사회에 팽배했던 물질적 욕망과 허황을, 영준이네 가족의 모습을 통해 깊이 파헤친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돼지꿈>의 몰락극이 담아내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음에 놀라움과 씁쓸함을 교차하며 느낄 수 있었다.



  

  <돼지꿈>의 도입부는 1960년대의 서울을 설명하며 시작된다. 당시 급격한 도시화의 중심이던 서울은 집의 수가 인구수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집을 가진 이들보다 없는 이들이 더 많은 상황을 설명하던 영화는 이내 창수의 집을 화면에 담는다. <돼지꿈>은 이러한 도입부를 통해 창수의 가족이 내재된 욕망을 내비치게 되는 동기와 명분을 설명하면서 관객들의 자연스러운 공감과 몰입을 유도한다.

  <돼지꿈>의 주인공인 창수는 돼지꿈을 꾼다. 창수의 꿈에 나온 돼지는 덩치가 너무 커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낑낑댈 뿐이었다. 이후 창수의 가족에게는 돼지꿈의 영향인지 연이은 기회가 찾아온다. 여학교의 교사인 창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찾아온 이웃이 창수의 가족에게 새끼돼지를 헐값에 팔고, 친구에게 소개받은 해외 사업가인 찰리 장의 제안으로 큰돈을 벌 기회를 얻는다.

  찰리 장의 제안이 불법과 관계된 일임을 알게 된 창수는 교사로서의 책임감으로 고민에 빠진다. 이내 의약품 밀수라면 한국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속으로 타협한 창수는 자신의 욕망을 부풀려 나간다. 그렇게 부풀린 창수의 욕망은 다른 이의 욕망을 자극한다. 창수와 함께 찰리 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친구가 돈과 함께 행방이 묘연해지자, 창수는 실망하는 동시에 부풀린 욕망을 꺼뜨릴 기회가 주어진다.

  어느새 이웃으로부터 받았던 새끼돼지가 훌쩍 컸을 즈음, 찰리 장은 다시 창수를 찾는다. 찰리 장은 의약품에 이어 화장품을 밀수할 작정이었다. 이번엔 친구 없이 찰리 장의 제안을 홀로 독차지할 기회가 오자, 간신히 꺼뜨렸던 창수와 그의 아내의 욕망은 다시 힘껏 부풀어 오른다. 찰리 장은 창수와 그의 아내에게 다른 이들과 일을 나누어 안전하게 투자하라고 권하지만, 이미 욕망에 먼 그들에겐 일을 나누는 것은 돼지꿈을 거역하는 행동이었다. 세가 밀릴 대로 밀려 집을 잃게 생긴 창수의 아내는 찰리와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애써 얻은 돼지를 팔고, 이웃에게서 돈을 빌리기까지 한다. 꿈속의 돼지처럼, 그들의 가정은 부푼 욕망을 받아들이기 벅찬 것처럼 보일 정도다.

  찰리 장의 가방 속엔 화장품이 아닌 돌뿐이다. 창수의 욕망은 돌을 화장품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지나친 크기의 돼지를 들이려던 창수는 결국 현관을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부모님의 돈을 모두 가져가 버린 찰리 장을 복수하겠다고 나서던 영준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창수와 창수의 아내는 돼지꿈이 두고 간 지나친 욕망의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된다. 욕망으로 끝에 내몰린 창수의 가정은 1960년대가 미처 비추지 못한 한국사회의 단면을 영화적으로 표현한다. 초반부의 희극적인 묘사와 대비되는 결말부의 전개는, 겉으론 화려해 보이는 한국사회를 점진적으로 드러내면서 돼지꿈이 가진 한계와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은 당시 영준 역을 맡은 안성기 배우의 아역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인 허장강, 문정숙, 김승호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캐스팅 자체로 이목을 사로잡는 작품이기도 하다. 서울이 발전하던 모습과 그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으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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