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책방 31.

잔인한 달

by 이창우

0430. 그 숫자를 기억하는 일은 시인 앨리엇 시 <<황무지>>가 있어서다. 유명한 문구이기도 한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수식이 4월 마지막 날에 나를 단단하게 묶어 놓았다. 시인의 시와는 동떨어진 감정 같지만 잔인하다는 의미도 개인마다 달라질 테니. 그 후 해마다 나를 휘청거리게 하던 4월 마지막 날. 바로 그날이 새 날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는 중이다.


4월 30일 일요일. 노을이 지고 있나 보다. 하늘에 주홍빛 기운이 번지고 있을 무렵 책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얼마 만에 오는 사람인지 조차 잊고 있을 정도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커피 향기가 너무 좋다며 둘러보는 얼굴에서 빛이 난다.


무료로 책을 빌려 준다니 요즘 시대에 드문 일이네요.

많은 책은 아니지만 개인 서가를 열어 책도 빌려 주고 있어요.

빌려가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그냥 웃는다.


그럴 줄 알았어요. 주문하면 책도 살 수 있는 거죠?

그럼요. 그래도 가끔 주문하시는 분들은 있어요.

동네 책방이 있다니 멋져요. 젊은이가 예쁜 생각을 했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여기 사람은 아닌가 봐요?

서울에서 왔어요.

책방 하려고 설마?

네. 책방 하면서 살아 보려고요.

부모님이 허락을 하시다니 그분들도 훌륭하시네요.

시간이 좀 걸렸어요. 가족 도움으로 살고 있으니 아직 멀었죠.

헬렌 니어링 <<조화로운 삶>> 읽어봤어요?


고개를 가로젓는 나를 보며 책 주문을 하신다.


며칠 걸려요. 도착하면 전화드릴게요.

다음 주 미사 올 때 들릴게요. 일요일도 책방 문은 여는 것 같으니.

아직 특별히 닫는 날은 정하지 않았어요.

나는 노인복지관에서 합창단 지휘를 하고 있어요. 전화번호 남길게요.


<<조화로운 삶>>은 비문학 텍스트로 일부분 발췌한 것을 들여다본 기억이 난다. 비문학은 그냥 마구잡이로 풀어야 한다는 선생님 얘기와 함께 언젠가는 원본을 다 읽어보겠다는 야무진 마음도 먹었던 때가 있었다.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그 마음도 4월 마지막 날 찾아온 지휘자선생님 덕분에 실행해 볼 계기가 되었다.


커피향기에 책 냄새마저 향기롭다며 서가를 둘러보시고 고개를 끄덕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붉은빛이 도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분이다. 성당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엉뚱한 길로 돌게 되면서 책방을 발견했다고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내가 더 신이 난다.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며 그래도 이런 사람이 있으니 대한민국은 희망의 나라라고 칭찬까지 해주시고 다음 만남을 약속하셨다. 이 순간 칙칙하고 무거운 짐이 휘리릭 어깨 위에서 날아가는 듯하다.


어르신이라 부르기에는 젊은 느낌에 나의 노년을 잠시 상상한다.


내가 젊을 때 읽은 책들이 많이 눈에 띄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럽고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람처럼 편안하다.


커피 괜찮으시면 드시겠어요?

내가 커피를 엄청 좋아해요. 책방지기님이라 부를까요?

저는 이재인입니다.

재인 씨, 이름도 마음에 든다. 나는 김남복. 커피 좋아하나 봐요?


우리는 커피향기를 나누며 책 이야기로 시간 흐름도 잊은 채 함께 한다. 젊은 시절부터 칠십이 넘어까지 책과 음악으로 지나온 선생님 이야기는 소설 같은 삶이다. 20대에 서울로 나가 있다가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된 긴 이야기가 나와는 반대 방향성이지만 닮은 점이 많다.


선생님 집으로 초대까지 받고 보니 이렇게 된 상황이 처음이기도 해 생소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공간이 해내는 다리 역할이 서로에게 닿기까지인지 모른다. 사람이 만나 서로를 알아차려 갈 순간을 만들어 주는 곳, 이곳에서 열리는 내 5월은 이 햇살만큼 따뜻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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