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서 같이 읽는 5월 책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인데 엄마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책장을 열면 처음 만나는 글이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이다. 작가와 소통한 나는 글 속에서 '내가 먹은 마음'을 발견하고 울컥한다.
엄마는 서울을 떠나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안다. 대한민국은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산다. 개인에게 태어난 환경이란 엄청난 일이다. 스스로 그 환경을 둘러보고 바깥 시선을 의식할 수 없다면 그 사람 세계는 거기서 멈춘다. 걸어서 땅 끝까지야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며 삶을 짓는 일은 가능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상상하는 일 아니던가.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중에서-
내가 먹은 마음에 수많은 알갱이들이 스르르 무너져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꾸역꾸역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알갱이 하나하나 온전하게 남은 것이 있다. 바람처럼 이 땅을 스치고 떠나갈 즈음 내가 먹은 마음의 알갱이 중 제 모습을 지켜낸 알갱이가 있을지는 모른다.
작가의 알갱이 하나가 내게로 와 생명으로 꿈틀거린다. 5월 하늘은 푸르다. 그 하늘을 이고 바람은 초록빛으로 손짓한다. 바람처럼 모두가 제 갈 길을 찾아간다. 내가 마음먹은 알갱이 하나에 의지하며 깊은숨을 내쉰다. 깊고 푸른 밤에 제 빛을 잃지 않도록.
정윤에게서 연락이 왔다. 6개월 지나면 털고 내려오겠다고. 연애도 열렬하게 해 볼 때가 이십대라나. 한 사람을 알고 지내는 세월과 연애하는 동안 느끼는 감정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한눈에 반한다는 말은 듣기 좋은 연애 대사로 생각하는 내게 정윤이 꺼내드는 연애 카드는 영 불편하다.
연애박사라고 자화자찬하던 그가 연애를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내가 들었던 연애 대상만 일곱이던가 여덟이다. 그렇다면 평균 1년이다. 그러고 보니 믿지 못할 대상인데 그에게 그야말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있으려나. 나는 연애 감정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연애 상태까지 가는 게 사실 무리다.
연애라고 이름 달지 않았지만 비슷한 감정 유희가 있었다. 실행하기도 전에 베인 상처는 불쑥 흉측하게 가슴 한편에서 욱신거린다. 내가 누군가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또 누군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있다. 마주 볼 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결코 뒤돌아 보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도 관심조차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동안 지워진 감정이려니 했는데 정윤이가 들쑤셔 놓고 있다. 나도 어지간히 뒤끝이 있는 사람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