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말 건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창우 Dec 22. 2024

잡혀버리다

#핵개인_aII AB family

 책은 늘 내 곁을 지켜주어 왔고 많은 기회와 먹고 살거리를 주고 있다. 책으로 나를 살렸고 책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현란한 가구는 없어도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비교적 잘 살아 나온 셈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이십 대에 가진 초심을 지키는 일이다. 책을 가까이하고 글을 쓰면서 그 힘을 유지하고 있는 내게 뒤늦은 사회생활로 뇌가 엉키기 시작했다.


 저력이라고 할까.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이만큼이나 축적되어 있는 무거운 숫자를 달고 사는데... 다 헛소리다. 그 세월에 잡혀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푸른 비가 내린다.


 최근에 등장하는 단어이지만 실상 돌아보니 '에고이스트'로 지칭하던 나는 '핵개인'이었다. 내 세대처럼 외향을 갖추고 가족도 이루고 엄마가 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나'일 뿐이었다. 


 'aII AB family'라며 혈액형으로 굳이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싸이월드가 한참일 시절 우리 가족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다섯 명이 다 핵개인이었다. 커다란 원 안에 작은 동그라미가 다섯 개인 가족이다. 가장 늦게 사회생활에 입문한 나를 가리켜 한 마디씩 하는 말을 들여다보면 동그라미를 채우고 있는 다섯 가지 색이 보인다. 


 이제야 이렇게 살아온 세월을 엉키게 하는 원인은 뭉뚱그려서 사회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진실은 숨어있었다. 여러 가지 진실을 발견하면서 가장 큰 덩어리가 툭 내 앞에 나타난다.


잡혔구나!


 동질감과 상호의존성을 준다는 저녁 회식에서 뇌가 흔들린다. 저녁 한 끼를 배고프니까 채우는 일이 전부였다. 아직 밥을 같이 먹는 일이 편안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단순하지만 간단한 요리를 하고 나누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나. 외식을 하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말과 작은 웃음은 또 얼마나 상냥하던가. 


 뇌가 감당 못한 것은 이런 소소한 일상이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에 나도 모르는 사이 잡혀버린 것이라니. '돈오'라는 거창한 한자를 써야 제 맛이 날 것 같은 생각을 버리고 그저 깨달음이라고 하고 싶다. 


 오래 걸렸지만 2024년이 지나기 전이고 아직 다시 만난 세계도 현재형으로 지나고 있으니 다행이다. 푸른 뱀을 만나기 전에 벌써부터 뇌가 로제의 아파트를 찾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