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개인_aII AB family
책은 늘 내 곁을 지켜주어 왔고 많은 기회와 먹고 살거리를 주고 있다. 책으로 나를 살렸고 책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현란한 가구는 없어도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비교적 잘 살아 나온 셈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이십 대에 가진 초심을 지키는 일이다. 책을 가까이하고 글을 쓰면서 그 힘을 유지하고 있는 내게 뒤늦은 사회생활로 뇌가 엉키기 시작했다.
저력이라고 할까.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이만큼이나 축적되어 있는 무거운 숫자를 달고 사는데... 다 헛소리다. 그 세월에 잡혀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푸른 비가 내린다.
최근에 등장하는 단어이지만 실상 돌아보니 '에고이스트'로 지칭하던 나는 '핵개인'이었다. 내 세대처럼 외향을 갖추고 가족도 이루고 엄마가 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나'일 뿐이었다.
'aII AB family'라며 혈액형으로 굳이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싸이월드가 한참일 시절 우리 가족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다섯 명이 다 핵개인이었다. 커다란 원 안에 작은 동그라미가 다섯 개인 가족이다. 가장 늦게 사회생활에 입문한 나를 가리켜 한 마디씩 하는 말을 들여다보면 동그라미를 채우고 있는 다섯 가지 색이 보인다.
이제야 이렇게 살아온 세월을 엉키게 하는 원인은 뭉뚱그려서 사회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진실은 숨어있었다. 여러 가지 진실을 발견하면서 가장 큰 덩어리가 툭 내 앞에 나타난다.
잡혔구나!
동질감과 상호의존성을 준다는 저녁 회식에서 뇌가 흔들린다. 저녁 한 끼를 배고프니까 채우는 일이 전부였다. 아직 밥을 같이 먹는 일이 편안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단순하지만 간단한 요리를 하고 나누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나. 외식을 하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말과 작은 웃음은 또 얼마나 상냥하던가.
뇌가 감당 못한 것은 이런 소소한 일상이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에 나도 모르는 사이 잡혀버린 것이라니. '돈오'라는 거창한 한자를 써야 제 맛이 날 것 같은 생각을 버리고 그저 깨달음이라고 하고 싶다.
오래 걸렸지만 2024년이 지나기 전이고 아직 다시 만난 세계도 현재형으로 지나고 있으니 다행이다. 푸른 뱀을 만나기 전에 벌써부터 뇌가 로제의 아파트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