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샷
잡스가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사건이나 넥스트에서 벌인 뒤죽박죽 일 처리는 이미 유명하다. 1975년 스티브 워즈니악은 마이크로프로세서와 키보드, 스크린을 결합해 초기 개인용 컴퓨터 하나를 만들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회사를 차리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애플 I과 애플 II의 초창기 성공 이후 경쟁자들은 금세 애플을 앞질러 갔다. 1980년 아타리와 라디오섁은 애플보다 대략 일곱 배나 많은 컴퓨터(TRS-80)를 팔았다. 1983년 코모도어는 겨우 2년 전에 출시한 IBM PC로 시장을 장악해 1등에 크게 밀리지 않는 2등을 하고 있었다. 애플의 주가는 10퍼센트 이하까지 폭락했고 이익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애플은 애플 III와 리사Lisa로 스포트라이트를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잡스가 흥미를 잃거나(애플 III), 축출되기 전까지(리사) 주도적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였으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전설이 된 1984년 슈퍼볼 경기 광고에 등장한 ‘매킨토시’라는 애플의 신제품은 어마어마한 화제가 됐고, 처음에는 판매도 터졌다.
하지만 이 컴퓨터는 괴로울 만큼 느리고, 하드 드라이브가 없으며, 자주 과열됐다(잡스는 컴퓨터 내부에 팬이 없어야 조용할 거라고 우겼다). IBM과 코모도어가 각각 200만 대 이상의 컴퓨터를 팔았던 해에 매킨토시 판매는 월 1만 대 이하로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줄줄이 이어진 실패작보다 애플의 미래를 더 위험하게 만든 것은 핵심 인력의 연이은 퇴사였다.
회사를 떠나는 직원이 줄을 잇는 것은 회사 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시어도어 베일은 벨 연구소의 전신이 되는 조직을 설립한 후 그 어떤 집단도 ‘나머지를 희생시키면서 어느 한쪽을 무시하거나 편애한다면 반드시 전체의 균형이 깨질 것’이라고 했다. 버니바 부시는 2차 세계대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군 조직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강조하곤 했다. 거의 모든 시간을 자신과 같은 과학자들과 보냈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룬샷과 프랜차이즈를 똑같이 사랑하려면 타고난 성향을 극복해야 한다. 예술가는 예술가를 편애하고, 병사는 병사를 편애하기 마련이다.
잡스는 매킨토시를 연구하는 팀원들을 대놓고 자랑스럽게 ‘예술가’라고 불렀다. 애플 II 프랜차이즈를 개발하고 있던, 회사의 나머지 조직은 ‘멍청이’라고 불렀다. 애플 II 개발자들은 이에 반발해 스스로 ‘멍청이’라는 이름의 광대 그림이 그려진 단추를 달기까지 했다. 테디 베어 같은 인상을 주는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은 업계나 사내에서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는 사임하면서 조직원들의 사기를 꺾는 잡스의 공격적 행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애플 II를 개발하던 인력의 이탈이 얼마나 흔했으면 누구는 이런 농담까지 했다.
“상사가 자길 부른다고 하면, 그 상사 이름을 꼭 확인하도록 해.” 독버섯이 퍼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킨토시를 개발하던 핵심 설계자들까지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애플의 이사회와 최근에 선임된 CEO 존 스컬리는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해 봄 잡스는 실무에서 밀려났다. 잡스는 회사에 머물면서 소규모 조직을 만들어 자신이 들어본 신기술 개발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터치스크린, 평판 디스플레이도 있고,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있는 마린 카운티에서 별난 엔지니어들 몇몇이 엄청난 성능을 가진 그래픽 컴퓨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잡스는 떠나기로 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사임했고, 1985년 9월 넥스트를 차렸다.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능의 그래픽 컴퓨터라는 아이디어는 잡스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잡스가 애플을 떠난 뒤 남아 있던 팀원들은 존 스컬리의 주도로 매킨토시의 가장 눈에 띄는 문제들을 해결했다. 발열을 잡아줄 팬을 달고, 하드 드라이브를 추가하고, 메모리를 확장했다(그 결과 속도가 개선됐다). 매출이 다시 늘었고, 제품은 히트를 쳤다. 이내 잡스가 다시 소환되어 제품 혁신의 대가로 찬사를 받았다. 잡스는 애플 II와 매킨토시를 만들었다. 그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마우스를 대중에게 소개해 누구나 손쉽게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했다. 《플레이보이》와 《롤링 스톤》이 잡스를 인터뷰했다. 《타임》 《뉴스위크》 《포춘》 표지에 잡스 사진이 실렸다. 비즈니스 잡지 《잉크》는 잡스를 “지난 10년간 가장 뛰어난 사업가”로 선정했다.
잡스는 스타가 되어갔지만 넥스트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자 넥스트의 직원 몇 명과 컴팩 및 델의 경영진이 잡스에게 아이디어를 하나 내놓았다. ‘하드웨어를 벗어나라.’ 넥스트의 소프트웨어는 기가 막혔다. 넥스트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나 프로그래밍 툴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스나 초창기 윈도즈보다 우아하고 강력했다.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 제조사들이 그토록 원하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제조사들은 넥스트에 가장 필요한 것, 즉 ‘미래’를 제시할 수 있었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갈아타는 아이디어는 전형적인 전략형 룬샷이었다. 잡스는 하드웨어를 팔며 명성을 얻었다.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많은 하드웨어를 매년 내놓았다. 당시 스타는 반짝이는 기계에 유명한 자사 로고를 찍어서 파는IB M, 덱, 컴팩, 델 같은 회사들이었다. 소프트웨어는 만들어봤자 돈이 안 된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돈 되는 것은 하드웨어였다. 잡스를 당대 제품 혁신의 대가로 찬양하는 기사만 수십 건이었다. 앞서 에드윈 랜드나 후안 트립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드웨어를 버리라고? 잡스라는 모세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였다. 사실 잡스는 이미 모험을 건 상태였다. 애플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잡스는 마린 카운티에서 그래픽 컴퓨터를 개발하던 엔지니어 팀과 다시 연락을 했다. 더 크고, 더 빠른 기계를 가질 수 있는데, 도박을 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잡스는 그들의 회사를 사들였고 그들이 단독으로 넥스트보다 더 강력한 컴퓨터를 만들게 내버려두고 있었다.
바로 이 엔지니어들이 잡스를 ‘모세의 함정’에서 구해낼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잡스는 알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그들이 만든 기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잡스가 죽은 뒤 어느 인터뷰에서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잡스와 저는 언제나 실제보다 과분한 공로를 인정받을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질 테니까요.”
*이 글은 <룬샷>에서 발췌했습니다.
*도서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