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돌이의 간에 암세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도 열흘이 더 넘었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 대한 취향을 말하자면 나는 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시간이 흘러 미래에 내가 살아남았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내일 정도는 낙관주의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지만 그보다 먼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거의 대부분의 순간을 조급한 마음으로 보낸다.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만을 바라면서.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삼돌이의 수명은 끝났다고 생각하세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듣는 그 순간에도 내 품에 안긴 삼돌이는 그저 어딘가 조금 불편해 보일 뿐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숨 쉬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덤으로 사는 날들인 거예요."
덤으로 사는 날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초음파 사진 속에 떡하니 박혀있는 암세포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치 폭탄에 달린 타이머를 살에 장착한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고 있다.
해가 지고 밝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낀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가 잔 시간만큼 삼돌이를 잃어버린 것 같아 속이 아프다. 삼돌이를 거실에 두고 방에 들어가 일을 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삼돌이와의 순간과 맞바꾸어야 할 만큼 꼭 필요한 일인지 그 가치를 셈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당장 내일 삼돌이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일을 해야만 하는구나. 나는 아직도 이렇게 무능하구나. 삼돌이의 남은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눈에 담고 손으로 만지고 싶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구나. 거실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으면, 지금껏 충실하지 못했던 시간들 그리고 무모하고 나태했던 나의 행동들이 등 뒤에 칼처럼 날아와 꽂히는 것만 같다.
'내일 내가 죽으면 어떡해?'라는 말을 한 번씩 하긴 했지만 '네가 내일 죽으면 어떡해?'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내일 죽을 것을 안다고 하면 그냥 오늘을 조금 더 솔직하고 충실하게 살고 말겠는데 '너'를 잃을 것을 알게 된 오늘은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삼돌이의 죽음을 앞두고도 당장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아주 작은 변화들이 있을 뿐이다. 삼돌이의 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계량해서 준다거나 배변 시간을 기록한다거나 하는 것들. 이런저런 핑계로 종종 빼먹기도 했던 산책을 하루 두 번, 비가 와도 나가는 것 정도.
조금 더 큰 변화라면 삼돌이가 있는 곳으로부터 15분 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과 가능한 외출하지 않게 된 것인데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취직 준비도 그만두었다. 근데 이마저도 크게 실감은 나지 않는다. 원래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또 원래 별로 취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취직 천천히 해야지'와 '절대로 출근할 수 없다'는 꽤 다른 상황이라서, 당장 앞으로 삼돌이의 병원비를 생각해서라도 돈은 벌어야 하니 원격으로 처리 가능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일하고 일해서 속상하고 그렇다. 병실에 계신 엄마를 두고 출근을 하셔야 했을 아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본다. 내일 삼돌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길 바라며, 삼돌이가 잠든 시간 동안 밀린 일을 하러 간다. 삼돌이가 숨을 쉬는 이 시간이 최대한 더디게 흐르길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