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기 전부터 고문을 당해야 하는가...
왜 가기 전부터 고문을 당해야 하는가... 여행 그까이께 뭐라고.
치앙마이 3주살이 가기 일주일 전. 혹시나 모를 일(전염병을 옮아오는 일 따위)을 대비해 둘째를 가정 보육하겠다는 내 말에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 물론 가정 보육에 대한 결심을 전하는 내 말에 한숨이 섞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나랑은 너무 다른 둘째를 키우는 것은 첫째 육아 난이도의 두세 배쯤...? 아니, 다섯 배는 된다고 말해야 할까? 그런데 일주일이나 일대일 마크를 해야 한다니. 차라리 첫째랑 단둘이 여름방학 한 달을 보낼지언정, 둘째 일주일 가정 보육은 피하고 싶다! 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혹시나 모를 일에 대한 대비라는 명목하에 몸은 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한 쪽을 택하기로 했다,라고 하기엔 내 마음이 썩 편하지가 않은데....? 사실 이건 이상형 월드컵 같은 거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최악일까를 곰곰이 따져보아 선택하는 것. 오랜 시간 날 지켜봐온 언니들 말에 따르자면, 나는 걱정인형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굳이 굳이 싸잡아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걱정 회로를 돌린다. 등원시켰다가 혹시나 바이러스에 옮아 아프면 어떡하지? 아픈 애를 데리고 여행 갈 수 있나? 물론 내 대답은 절대 절대 그럴 수 없다,이다. 아픈 애를 비행기 태워 해외까지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강심장은 되지 못한다. 엄청난 수수료를 물고서라도 결국은 포기할 테지.
그렇지만 포기하기에 이번 여행은 좀 크다. 신혼여행 이후로 9년 만에 나가는 해외. 게다가 아이들의 첫 해외여행이다. 남편이 10년 근속 휴가를 받아 큰맘 먹고 나가는, 무려 3주짜리 여행이란 말이다. 자의든 타의든 딱히 여행을 즐기지 않았던 우리 가족 성향상 기념비적인 결심이었다. 사실 아직 어린 둘째 때문에 해외는 딱히 내키지 않았던 내가 그냥 제주도(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니 과장 삼아 수십 번도 더 가봤을,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나 가자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이때 아니면 언제 나가보냐며 해외여행을 바라던 남편과 김신지 작가님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며 생긴 내 충동성의 콜라보로 치앙마이행이 결정되었다. 마음이 변할세라 비행기 티켓도 그날 당장 끊어버렸다. 그게 벌써 지난 1월. 아주 먼 일인 줄로만 알고 느긋하게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불이 붙었다. 여행에서 나한테 가장 중요한 숙소를 고심하여 정하고 아고다를 들락거리기를 여러 번. 나중에 조급하게 챙기지 않도록 필요한 물건들 리스트를 정리하는데 없다! 뭐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여름에 취약한 우리의 휴가는 늘 초여름 혹은 초가을이었다 보니 그 흔한 물놀이 용품마저도 모두 새로 사야 하는 처지였다. 꼭 필요한 것만 산다고 사는데도 돈도 쓰고 시간도 쓰고 마음도 써야 하는 그 상황이 나를 힘들게 했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내 마음에 쏙 드는 것들을 사려다 보니 이것저것 알아보고 고민해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뭘 알아보고, 계획을 짜면 스트레스 받을 것이 뻔한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숙소 말고는 식당이며, 관광이며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나를 힘들게 했다.
여행을 몇 주 남겨놓고 나서는 이런저런 일들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물론 사실은 아니다, 그래 보였을 뿐) 태평해 보이는 남편 때문에 잔뜩 예민해진 이 시점에 가정 보육이라니. 그렇지만 이렇게 고생해서 준비한 여행을 날릴 수는 없지,라는 마음으로 마지못해 결정했는데. 그 치열한 이상형 월드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지막 등원을 하고 그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집콕하며 신경을 썼는데도 그 쎄한 예감은 틀리질 않았다. 아이의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좀 나아졌나 싶다가 토할 것 같은 기침이 시작되더니 눈에 눈곱이 끼고 아데노가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스크 씌우고 따로 재운 보람도 없이 첫째도 열이 시작. 아, 인생이란.
"왜 가기 전부터 고문을 당해야 하는가... 여행 그까이께 뭐라고."라는 언니의 말에 "그러게. 즐거울라고 가는 여행인데 왜 나는 셀프 고문을 하고 있지?'라고 답했는데. 셀프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고문이었나 보다. 그리고 여행 전에 가정 보육이라니 생전 처음 들었다는 이 언니의 말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나에겐 당연하지 않고, 나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성향의 차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렇게 걱정 없이 살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타고나기를 걱정인형으로 태어났으니까. 그렇지만 한 번씩 마음을 내려놓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비슷하게라도 되는 날이 오겠지. 너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딱 그 순간만 즐기는 날이 오겠지.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평온을 얻는다'라고 말했다.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것.
4일 뒤 우리의 첫 해외여행에서는,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치앙마이. 딱 그 순간에만 집중하리라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