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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음표 ♩ ♪ ♫ (1)

글로쓰는 가족앨범 <네번째 페이지>

by 리지사비



-♪-


지난해

난생처음 혼자 떠났던 해외여행

매번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여행이 아닌,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기억의 서랍 속에서 유난히 반짝이며,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조각 하나를 꺼내보려 한다.


-

포르투 (Porto).

그곳은 여전히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으 일렁인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때마다

늘 마주치는 곳이 있었다.


바로 볼량시장 (Mercado do Bolhão)이라는 재래시장이다.


흔히 떠올리는 북적이고 거친 시장 풍경과는 다르게

마치 퍼즐 조각이 정갈하게 맞물린 듯한 공간,

신선한 식료품부터 향긋한 올리브유, 달콤한 디저트와 간단한 간식거리 그리고 형형색색의 꽃들까지.

포르투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꽤 큰 시장이었다.


포르투에서의 여행 일정이 끝나기 전에 꼭 한 번은 들러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다음 여행지를 향해 늘 바삐 지나치던 어느 날,

내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은 문구가 하나 있었다.



'piano do mercado'

This piano is for you. Sit down, alone or with ohers, and play. Let us hear your music.



시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

너무나 생경한 풍경이었지만,

'당신의 음악을 들려달라'는 그 다정한 초대에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주목받는 무대도,

수백 명의 관객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공간.

한 번쯤은 용기 내볼 법도 한데,

할지 말지 고민의 회로만 빙빙 돌리고 있던 찰나였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녀가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한 음, 한 음 조심스럽게 시작하더니

이내 파도가 몰아치는듯한 크레센도 구간을 지나,

머리를 흔들며 격정적으로 연주를 마쳤다.


나는 홀린 듯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든 채, 자연스럽게 단 한 명의 관객이 되어 그녀의 음악에 동참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떠올릴 수 있는 최상급 영어 표현을 골라 정말 좋았다고, 대단했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며 피아노 앞으로 데려갔다.


" You play too"


긴장할 새도 없이 어느새 의자에 앉아 '소녀의 기도'를 연주했다.

어렸을 때 다닌 피아노 학원 덕분일까.

여섯 살부터 꽤 오랜 시간 건반을 두드려온 덕분에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이 몇 곡 있었고,

그중 가족들 앞에서 가장 많이 연주했던 곡이자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했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방금 전 소녀의 열정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에

결국 곡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도망치듯 자리를 나왔다.


그게, 볼량 시장의 피아노와 처음 교감을 나눈

미완의 순간이었다.




-

포르투에 머문 지 3일째가 되던 날,

전날 와이너리 투어를 동행하면서

알게된 동생과 볼량시장을 다시 가게 되었다.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 머릿속에 그려왔던 재래시장의 모습은 없었다.

블록 단위로 깔끔하게 정리된 가게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지 식재료들,

그리고 볼량 시장만의 특유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시장 골목마다 와인 잔을 들고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물건을 사고 파느라 정신없었던 내 머릿속 시장과는 달리,

이곳에는 낭만과 느긋함이 공기처럼 떠다녔다.


와인 잔에 이끌려 따라가다 보니 글라스로 와인을 파는 가게에 다 달았고

어느새 내 손에도 화이트와인 한잔이 들려 있었다.

이 시장의 진짜 묘미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와인을 한잔씩 음미하며 장을 보는 것.


그렇게 와인을 마시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전날 처음 마주했던 그 피아노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술기운이었을까, 아니면 포르투의 마법이었을까.

출처를 알 수 없는 용기가 갑자기 생겼다.

"어렸을 때 조금 쳐봤는데 혹시 피아노 치는 거.. 찍어줄 수 있어?"


가장 자신 있는

'소녀의 기도'부터 시작해 한 곡, 한 곡 연주를 이어갔다.


혼자라는, 혹은 여행자라는 이유에서

생긴 이상한 용기 덕분인지

이번에는 한 곡을 온전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곡을 연주했다.

'러브 스토리(Love Story)'


전주를 연주할 즈음 백발의 노부부가 피아노 곁으로 다가왔다.

미소로 눈인사를 건네고 멜로디를 이어가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작게 속삭이셨다.



" I can cry...."




잘난 것 없는 연주였는데

눈물을 그렁그렁 거리시면서 들어주셨던 그 순간.

그 짧은 순간의 그분의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마음 깊은 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까지 연주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시장 한복판에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사람들이 모여따뜻한 시선과 박수를 보내주었다.


중간에 곡의 흐름이 멈췄던 실수도 있었지만,

잘 쳤는지 틀렸는지는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다정한 분위기였다.


.

.

.

돌이켜보면 그날의 연주는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했다.


의식하지 않으면 놓칠수있을정도로 매우 짧지만

한 곡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8분음표처럼,


다른 여행지보다도

짧게 스쳤던 순간이었지만

여행 중 나만의 리듬을 만들었던, 짧지만 강력한 순간임은 분명했다



볼량 시장의 매력에 이끌려

잠깐의 용기로 나만의 음표를 만들었던 순간을 회상해 본다.




볼량시장의 그 피아노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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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출처:인스타그램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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