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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Apr 17. 2024

1권 : 서글픔

부스러진 시간을 다시 쓸어 담는 것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을 다 읽고 책을 덮은 후 나를 덮친 첫 번째 감정은 서글픔이었다. 그 감정의 진원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혹은 버려짐과 덧없음으로 상징되는 죽어버린 시간 즉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 없는 과거와 맞서 그 부스러진 시간을 다시 기억 안으로 쓸어 담으려는 주인공의 애처로운 처지를 계속 보아야 했기 때문일지도...


1권은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마르셀(소설에서 화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으니 마르셀이라고 하자)이 부활절 방학 무렵이면 자주 놀러 갔던 시골. 즉 외할아버지의 별장(정확히는 레오니 이모댁)이 있던 콩브레에서의 기억을 집중적으로 더듬는다.     


1권을 읽는 내내, 마르셀의 모습이 어릴 적의 나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르셀은 유년시절, 종종 파리를 벗어나 가족과 함께 휴양을 보내는 시골 콩브레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다. 유치원, 국민학교 시절(지금은 초등학교로 정체성이 바뀐)의 어린 나는 방학이나 추석 같은 명절 무렵이면 전북 남원에 있던 시골 외갓집을 방문을 하곤 했다. 그렇기에 도시와 시골, 본인의 집과 외갓집을 오고 가는 어린 마르셀에게 나는 심리적 장벽 없이 곧바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 시절 내 외갓집은 마르셀의 외갓집이 본래는 파리에 있는 것처럼 이미 서울에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상경 후에도 남원에서 살던 집을 팔지 않았다. 그 집은 일종의 별장처럼 남아 있어서 나는 매년 방학 무렵이면 어머니 손을 잡고 남원에 내려가 한 달이 넘는 장기투숙을 하곤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이 경험한 콩브레는 레오니 이모 뿐만 아니라 외가 쪽 친인척이 모여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내가 머물렀던 남원 시골 동네엔 외갓집 바로 위에 큰 외할아버지가 살던 집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사실은 마을 자체가 아예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이른바 집성촌이었다. 그렇기에 방학은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갓집 대식구, 이름 모를 외가의 집안어른들을 모두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외갓집에 내려가면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내 또래들과 산과 들을 떠돌며 해 질 녘까지 신나게 뛰어놀곤 했다. 찔찔 흘린 콧물을 러닝셔츠에 다 묻힌 채 온 동네를 쏘아 다니곤 했는데, 메뚜기를 잡는답시고 논에 덥석 들어갔다가 거머리에 물리기도 하고, 논둑에서 뱀을 만나 기겁을 하고 도망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소설에서는 마을을 상징하는 장소로 생틸레르 성당이 묘사되는데 그러하면 나에겐 나를 외갓집에 실어다 주었던 지금은 폐역이자 관광지로 바뀌어버린 서도역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는 주인공 마르셀이 나와 같은 처지라고 추근대면서 그의 콩브레에 대한 회상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그가 어릴 적을 기억하기 위해 첫 시동을 건 상황은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이제 나는 확실히 잠에서 깨어났다.

15~24p

     

마르셀은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나서 콩브레 시절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 기억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다. 수면과 가수면 상태를 오고 가면서 기억을 기필코 끄집어내려고 애를 쓰는 대목은 무려 수페이지에 걸친 복잡한 어구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만연체의 문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가 더듬은 것은 유년시절 매일 해가 떨어지면 강제로 잠이 들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어머니와 작별을 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 그는 자기 전에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는 것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이 분리불안의 상황은 마르셀에게 지금으로 치면 트라우마처럼 몸속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는 듯하다. 마르셀은 그것을 거듭 반복해서 거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결에 잠시 피어올랐던 잠깐의 순간 이외에 더 이상 기억은 재생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스스로 떠올리려 했을 때 온전히 모든 것들이 복원되지 않는 것. 프루스트에게 있어 그러한 속성은 의지적 기억이자 자발성이 내포한 한계로 본 것  같다.     


반대로 그는 우연히 마들렌 조각이 든 홍차 한 모금을 마셨을 때.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유년시절을 완전하게 떠올린다. 마들렌과 홍차 만의 맛과 향의 감각 그리고 그것을 입 안에서 받아들였을 때 희열에 가까운 만족감이 곧바로 레오니 아주머니에게서 받은 그 마들렌으로 향했고 아득히 멀어보였던 두 지점 사이를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른바 그 유명한 프루스트 효과, 즉 비의지적 기억이다.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87~89p


고백을 하나 해보자. 나에게도 마들렌 같은 음식이 하나 있다. 가죽나무 순이나 김에 찹쌀을 발라 튀긴 음식인 부각이다. 부각은 남원 지역에서 유래된 전라도 사람들이 즐기던 향토음식인데 몇 년 전 한 연예인이 부각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TV에 비치면서 본의 아니게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에 힘입어 그즈음의 나도 오랜만에 부각을 사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부각 한 조각을 입에 넣은 그 순간이 지금도 떠오른다. 마르셀에게 기억을 되살린 마들렌처럼, 유년시절 외갓집에 대한 기억이 굵은 빗방울 마냥 머리 안을 순식간에 적셨기 때문이다.


외갓집 앞마당 안 너른 평상 위에 울긋불긋한 고명이 곁들여진 부각들. 그중 하나를 집어먹고 싶어 입맛을 다지던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뻣뻣한 부각이 내 입 안 치아와 맞물리며 사각사각 부서져버릴 때 들리던 청각, 고소하고도 짭조름한 맛을 입안 가득 맴돌게 했던 풍미가 내 의식과 화학적으로 결합이 되면서 그 부각 하나가 나를 30여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남원의 외갓집에 내려다 놓은 것이다.     


마르셀은 드디어 마들렌을 통해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 내친김에 콩브레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도전적인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콩브레 마을 전체를 샅샅이 쫓는다. 정말 샅샅이 쫓는다는 의미가 맞을 거 같다. 그는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한 성당, 계절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꽃과 나무들 같은, 본인의 감각에 걸린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문장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나는 1권을 지배하는 정서가 마르셀이 마들렌 과자를 매개로 기억이 복원되자 느꼈던 첫 감정인 환희가 아닌 서글픔이라 생각하고 싶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책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근본기분. 즉 근원적 감정이 향수라고 했다. 향수는 고향(태어난 곳이 아닌 나의 기억과 추억의 근원이 깃든 곳)에 돌아가지 못함을 전제로 한다. 설령 고향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변했고 예전과 같은 상태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야 발현되는 감정이 바로 향수다. 그렇다면 향수를 구성하는 여러 성분 가운데 서글픔은 가장 중요한 정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시도하려는 측은하고도 가여운 노력이 향수 안에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마르셀은 기억을 향수에 휘감아, 향수에 전적으로 의지한 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콩브레 시절을 재현한다. 결국 내가 소설을 읽은 후 서글픔을 느낀 이유도 기억을 지탱하는 정서가 향수에 있고 그 향수라는 것이 잠자리를 잡고 싶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외갓집 시절의 내 고사리 손과도 같은 것이라는 점에서 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모든 것들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셀의 부모님. 외할머니, 외갓집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 모든 것들이 이미 꺼져버린 것들이다. 또한 이들과 함께 했었던 시간과 공간 역시 소멸되었다. 물론 마르셀의 시선을 붙든 성당의 종탑이나 레오니 이모의 집 같은 마을 곳곳의 외관은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르셀 만이 경험했던 그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마을은 이미 과거 저 멀리 흘러가버린 것이다. 사실 마르셀도 자신이 부여잡고 있는 지금의 모든 기억이 허깨비와도 같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그의 생각은 어린 시절 분리불안으로 떨고 있던 그를 달래기 위한 장난감인 마술환등기로 대변된다.

 

.. 가족들은 내 기분을 바꿔 주려고 마술 환등기를 생각해 냈고, 저녁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내 등잔에다 환등기를 씌워 주었다. 그 벽에는 마치 순간수간 흔들리는 채색 유리인 양 전설이 그려져 있었다... 그 곡선은 단지 환등기 홈 사이로 밀어 넣은 틀 속에 끼운 타원형 유리판의 둘레에 불과했다.
 
26p   


물론 기억은 분명 유년시절의 콩브레의 모든 것을 복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재구성된 시공간은 우연을 통해 감각과 의식으로 재구성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언제든 다시 사라질 휘발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더듬으며 관심을 겨우 붙들어야만 그러한 노력을 하는 순간만큼만 기억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마르셀이 경험한 시공간이 모두 죽어버린 상태에서 그것을 붙들려할 때 느껴진 나의 감정이 바로 처연하고도 서글픈 그 어떤 무엇이었다.


이 소설은 작가 프루스트에게 일종의 자서전 같은 것이기도 하다. 프루스트가 소설을 통해 기억해 낸 이들과 이들이 만들어낸 시간과 공간은 모두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 토시 하나라도 잃으면 안 된다는 듯 샅샅이 복기해 기적적으로 되살린 프루스트 역시 이미 100년 전의 사람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 글을 읽는 나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내가 지금 경험 중인, 내 생애를 걸쳐 통과를 하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도 미래의 준비된 시간과 공간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서 차곡차곡 덮혀질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잊힐 것이다.     


1장을 덮는 순간, 그런 나의 미래를 투사하면서 서글픔이 곧바로 밀려왔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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