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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Jan 20. 2022

일 년이 지났다.

아빠를 보내고 나서



 잠을  자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어제는 꿈자리가 사나웠고, 오늘은.. 아빠 생각이 났다.








생각이 자주 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스치는 기억처럼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같은 뜬금없는 순간이다. 계기가 있는 게 아니라 무의식의 발현이다. 한번 생각이 나면, 아팠을 때 모습, 건강했을 때 모습, 좋아하던 음식, 목소리, 얼굴 하나씩 떠올려본다. 그 생각의 끝엔 꼭 눈물이 난다. 어쩔 수 없다. 30살에 아빠를 보내고 1년이 지났다.


 새벽에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달려간 엄마와 동생도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은 정말 예상치 못하게 왔다. 그날 잠자리에 든 아빠도 본인이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엄마와 동생에게 심장이 멎은 뒤에도 뇌는 살아있다고, 들을 수 있으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대성통곡 속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전해졌을 거라 믿는다. 빈소가 차려지고 다음날 입관을 할 때 나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아서일까, 아빠가 돌아가신 게 실감이 안 날 때가 많이 있다. 매일 통화하지 않았었기에 오늘도 그냥 아빠와 연락을 안 하는 날들 중 하나인 것 같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날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집에서 매일 보던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


 아빠는 생전에 종교가 없었고 엄마와 나 동생 세 식구는 기독교에 가깝다. 우리는 할머니를 보내드렸을 때처럼 원불교를 통해 49제를 했다. 49일 동안 교당에 아빠의 영정사진을 모시고 교주님이 매일 향을 피우면서 기도를 해주시고, 가족들은 일주일에 한 번 교당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고인이 이 세상을 떠나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비는 것이지만 사실은 남은 사람들이 고인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남은 사람들이 울면 고인이 못 간다는 얘기가 있듯이 이 기간 동안 미련과 후회를 놓아주어야 한다. 엄마는 매주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엄마와 아빠의 관계는 나와 아빠의 것과는 다르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너무 작았다. 임종도 지키지 못한 나는 30년을 애증의 관계로 산 엄마와, 최근 몇 년 동안 아빠의 병시중을 들며 고생했던 동생보다 조금 울려고 노력했다. 자격이 부족했다.


 유골은 화장해 할머니 집 뒷산에 있는 가족 유골함에 모셨다. 아빠는 생전 큰아버지와 함께 그 유골함을 짓는 공사를 주도했다. 할머니 집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차를 타고 한참이나 가야 나오는 시골이라 자주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꼭 그곳에 가야지만 아빠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집에서도 간단하게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큰아버지가 말씀하셨지만, 49제의 마지막 날에도 우리는 시골에 내려갔다. 제사상에 꼭 올려야 하는 황태, 과일, 술 같은 것 음식을 챙기고 아빠가 좋아하던 곶감도 가져갔다. 제사상을 차리는 전통문화가 고인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은 현대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어렸을 때는 좋기만 했던 아빠와의 관계는 내가 성인이 되어 아빠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틀어졌다. 툭하면 싸우는 엄마와 아빠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 편을 정해야 한다면, 나는 20년 동안 몸이 닳도록 고생해 가족을 먹여 살린 엄마 편을 들었다. 혼자 한국을 떠나 이민을 했을 때는 아빠와 말도 잘하지 않는 사이였다. 거동이 불편해져 이것저것 챙겨줘야 하는 아빠가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귀농한 아빠가 건강을 잃자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고생시키는 게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몇 년 만에 한국에 가서 아빠를 봤을 때는 미움보다는 애틋함이 컸다. 동생과 함께 아빠를 휠체어에 태워 영화관을 가고, 아빠가 좋아하던 식당에 갔다. 그다음에 본 아빠는 병원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아빠와 산책을 많이 했다. 하굣길에 아파트 정문에 도착할 때쯤 양복을 입고 지하철역에서부터 걸어오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는 그 당시 오후 3시면 퇴근을 하는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집으로 올라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나란히 운동복을 입고 차를 타고 도림천으로 갔다. 아빠는 걷기 운동을 좋아했다. 걸으면서 둘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로 엄마 뒷담이었다. 돈은 엄마가 벌었지만 용돈은 꼭 아빠에게 받아썼는데, 아빠는 항상 ‘있을 때 팍팍 쓰고 없으면 쫄쫄 굶는’ 한탕주의를 가르쳤다. 그래서일까 나는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푼도 모으지 못했다.


 아빠랑은 등산도 자주 했다. 아빠는 산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했다. 등산을 가면 항상 아빠 친구분과 셋이 관악산에 올라 해먹에서 낮잠을 잠깐 자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나눠먹고 내려왔다. 아빠는 등산로에 노점상이 나타날 때마다 라디오나 해먹 같은 것들을 유심히 보고 하나씩 사곤 했다. 아빠의 벙거지 모자도 그렇게 산 것이다. 49제를 하는 날 벙거지 모자는 태워서 아빠한테 보내줬다. 영정사진을 태울 때 고인이 마지막에 입고 있던 옷, 자주 신던 신발, 좋아하던 물건 등을 함께 태워준다. 집에 둘 사진은 제사가 끝난 후 새로 뽑아서 액자에 넣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슬퍼지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였을 때의 순간이 떠오른다. 아빠의 카톡 프로필도 마찬가지다. 산에 같이 가시곤 했던 아빠의 친구분은 아빠를 숨김 처리해놓으셨다고 하셨다. 도저히 못 보시겠다고. 장례가 끝나고 어른들에게 잊고 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잊어버려야 산다고. 외국에 사는 나는 그게 쉬웠다. 일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원래와 똑같은 일상이었다. 즐겁고 알차게 삶을 살아냈다. 그러다 보니 1년이 지났다. 문뜩 기억은 작년 그 순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이 어제 벌어진 것만 같다. 아빠를 자주 떠올리는 게 맞는 건지, 잊어버리고 사는 게 맞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동생의 꿈에는 자주 나와 말도 한다는 아빠가 내 꿈에는 딱 한번 나왔다. 너무나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에서 움직였다. 나는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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