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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Feb 16. 2021

코시국에 장례 치른 이야기

내가 겪을 줄은 몰랐던,



 할머니를 보내드린 건 2013년 2월이다.


그 해는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휴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시작으로 마지막 주 토요일에 생애 첫 토익 시험을 등록했다. 목요일 저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주에 계신 큰아버지로부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집에서 큰아버지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를 청하셨는데, 다음 날 아침 조용히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 1996년, 아버지가 처음 쓰러져 아산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여러 번 쓰러지셨다.) 친가에 고혈압 유전자가 있었는데, 술 담배를 즐기시다가 신부전증이 온 것이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병원에 계셔야 해서 7살 나와, 3살 동생을 돌보기 위해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 70 넘는 생을 시골에만 계셨던 할머니의 첫 서울 외출이었다. 할머니가 아침으로 끓여주신 청국장을 먹고 집 앞에 나가 유치원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아 눈물이 터졌다. 할머니께서 옷소매로 내 눈물을 닦아주시며 어쩔 줄 몰라하셨다. 할머니는 유치원 버스가 몇 시에 오는지 모르셨고, 내가 아침 6시부터 버스를 기다리겠다고 하니까 같이 나와주셨던 것이다. 병원에 있느라 몇 주 빠진 유치원이 너무 가고 싶었다.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처음 입어보았다. 흰색 핀을 머리에 꼽은 채 부지런히 육개장을 나르고 상을 치웠다. 입관 때 수의를 입고 누워계신 할머니를 보았을 때, 내가 알던 할머니 얼굴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버지가 우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를 화장해서 진안 집 뒷산에 있는 가족묘에 모시고 서울에 올라왔다. 결국 토익 시험을 보지 못했다. 그때가 내가 처음으로, 내가 계획하는 일정이 하늘이 정한 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이다.





   

 작년 10월, 아버지의 병환이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추석에 영상 통화할 때만 해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는데 갑자기 패혈증이 온 것이다. 아버지께서 일반 병실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께서 내게 잠깐 한국에 오는 게 어떻냐고 하셨다. 여름부터 가고 싶었던 한국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영주권 진행이 미뤄져 입출국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가격리기간이 생기고 나서 4주의 추가 일정이 필요한 일이라 더욱 결정이 어려웠다. 20년 넘게 이어진 아버지의 투병생활이 이번에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더 괜찮을 때 얼굴 보고 이야기 한마디라도 더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어머니의 판단이셨다. 결국 집과 직장을 정리하고 11월 25일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영주권 결과를 기다려야 했기에 자가격리 기간을 제외하고 약 4주간 한국에 머무는 일정을 짰다. 그 시기에는 다행히 병원에서 가족 보호자 1명의 면회를 허용해 하루 걸러 잠깐식 아버지를 보러 갔다. 보고 싶었던 딸일 텐데, 마스크 위 두 눈 밖에 보여줄 수가 없었다. 2021년 새해가 밝으면서 코로나 방역 강화로 인해 병원의 보호자 면회가 아예 금지되었다. 출국날 공항 가는 길에 들른 병원에서도 면회는 불가능했다. 며칠 전 잠깐 본 아버지는 두 손을 흔들면서 날 배웅해주셨고, 큰 딸을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다.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올해 말쯤 코로나가 좀 잡히고 입출국이 자유로워지면 또 와서 아버지를 보면 되니까.

   

캐나다로 돌아와 두 번째 자가격리를 마치고 나서 채 2주가 지나지 않았다. 나에게 딱 맞는 구인 공고를 찾아 설레는 마음으로 며칠에 걸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2월 안에는 취업을 해서 새로운 커리어를 이어나갈 계획이었다. 어느 날 오후 4시쯤 갑자기 동생이 보이스톡을 걸어 엄마와 함께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전했다. 병원에서 새벽에 전화가 왔다고 했다. 그동안 생사의 고비를 수십 번 넘겼는데 설마 이번이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엄마와 동생은 병실 밖에서 기다렸다. 코로나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30분이 지나도 아버지의 심장 박동은 다시 뛰지 않았다. 해외에 있어 부모님의 임종을 보지 못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아버지의 사망 시간은 나에게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시간 2 5 금요일 새벽 6 12이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도시에서도 근 3일 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국내선을 타고 밴쿠버로 가서 인천행 대한항공을 탔다. 커다란 비행기에 단 19명의 승객, 10명가량의 승무원이 있었다. 빈소에 도착할 때까지는 울지 말아야지 했는데 영사관에 보낼 자가격리 면제서를 작성하면서 처음 울었다. 부친의 부고에 의한 장례식 참석. 엊그제까지 별일 없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아버지께서 의사 선생님께 백내장 수술을 시켜달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아직 보고 싶은 게 많으시구나 했다.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와 카톡 대화를 올려보다가 눈물이 터졌다. 눈물이 마스크에 닿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데 마스크 안에서 이미 콧물이 난장판이 됐다. 실감이 나면서도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냥 가족들을 보러 한국에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 6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자가격리 면제서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 명동에 있는 호텔로 이동해야 한다고 2시간을 공항에서 버렸다. 다양한 나이와 국적의 격리 면제자들이 있었지만 가족사(死)의 이유가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시차가 달라 하루가 날아갔기 때문에 바로 빈소로 가도 둘째 날 밤이었다. 공항에서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렸으면 새벽에는 빈소에 갈 수 있는 일정이었는데 왜 단체로 움직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9시가 넘어서야 호텔 로비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객실로 올라가 다음날 아침 9시에 음성 결과가 나온 인원들을 해산시켜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 발인이 아침 8였다. 혹시 새벽에라도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아버지 발인을 위해 먼저 퇴소할 수 있는지 여쭤봤다. 객실 침대에 앉아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펑펑 울었다. 입관도 놓쳤는데 발인도 놓칠 수는 없었다. 작년에도 코로나로 인해 엄청난 영향을 받았는데 이렇게 크게 울 일이 남아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검사받은 지 8시간이 다 돼갈 때쯤 음성 결과 연락을 받았다. 사촌 오빠가 호텔로 픽업을 왔고 차 안에서 상복을 입었다. 빈소에 도착한 시간은 2 7 새벽 6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이틀 내내 내 빈자리를 느꼈을 엄마와 동생을 안아주었다. 지인들에게 부고 연락을 돌리는 일부터 빈소 및 병원 각종 행정처리를 27살밖에 안된 내 여동생이 하고 있었다. 모두 내 역할이었다. 어머니는 31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며 북받친 감정에 몸을 추스리기도 어려우셨다. 아버지가 아팠던 25년은 어머니에게는 병원비를 벌면서 병시중을 들던 시간이었고, 나와 동생에게는 아픈 아버지라는 그늘 아래서 애정과 원망을 동시에 느끼며 자책했던 시간이었다. 아버지 유골을 들고 진안으로 내려가면서 아버지가 건강할 때(조금이라도 덜 아팠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어릴 때는 엄격한 어머니에 비해 편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가 마냥 좋았다. 둘이서 저녁마다 도림천이나 보라매공원으로 산책을 가거나, 주말에 관악산으로 등산을 다녔다. 대화는 항상 즐겁고 재밌었고, 나는 가족 중에서 가장 아버지랑 사이가 좋았다.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아버지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관계 변화가 있었다. 그가 살면서 했던 이기적인 선택들에 미움이 쌓여 말도 아예 하지 않았던 기간도 있었고, 심한 말을 했던 순간들도 기억난다. 아버지는 죽는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평생 해외여행 한번 같이 가보지 못한 가족들? 아니면 가족보다 좋아했던 본인의 형제자매들? 젊은 시절에 좋았던 기억들? 아직 해보지 못한 일들? 본인이 자초한 인생이라고 미워하려다가도 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서 눈물이 주체가 안된다. 삶의 반을 아팠던 게 안타깝고 불쌍해서. 더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미안해서..







 삼우제를 비롯한 장례식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는 다시 자가격리를 하고 있다. 14일 중 6일을 면제받고 나머지 기간은 격리를 마저 해야 한다. 2월 24일부터 한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입국자는 비행기 타기 전에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내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한국인 시민권자는 입국 후 검사만 필수였기에 나는 입국 후 검사를 한번 받았고, 격리 해제 전에 한번 더 받으면 된다. 만약 나도 비행기 타기 전에 검사를 받아야 했다면 빈소의 마지막 날 발인도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캐나다에는 24시간 운영되는 선별 진료소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최대 48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캐나다도 2월 22일부터 입국 후 코로나 검사가 필수화 된다고 한다. 1월에 입국했을 때는 비행기 타기 전 검사만 필요하고, 입국 후에는 의무 자가격리만 14일이 있었다. 이번에 다시 캐나다에 가면 4번째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작년에 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이동할 일이 생길 줄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도 여행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이라 해외여행 못 간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도 못했었다. 삶이 멈출 수는 없는 것인데.. 모든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기만 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기분이다. 다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의 상황이 내가 세운 계획은 하나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팩트는 코시국에 아버지를 잃었다. 입원 후 가족 다 같이 아버지와 있지도 못했다. 달력에 표시된 2월 기일이 2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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