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지나 Aug 04. 2020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

썩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는 진열된 식품들을 미리 적어놓은 리스트를 보며 카트에 담기 바쁘다. 집에 돌아와 정리하다 그때서야 발견한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를 보면 마트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게 어디 마트 잘못이겠는가. 유통기한이 지난 것도 아니고 수익이 중요한 판매자의 입장에선 기한이 임박한 우유를 가장 앞에 진열하여 먼저 판매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인 전략인 것을. 꼼꼼하게 체크하지 않은 내 탓이지 누굴 탓하리.

며칠 사이 심기가 불편해지는 말들을 듣고 기분이 꽤나 상했었다. 다행히 이젠 좀처럼 그런 말들로 잠을 못 이룬다거나 눈물을 훔치는 등의 감정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일은 없으나, 짜증이 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연 있게 생겼다거나 저렇게 생긴 여자들이 박복하다거나.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남편 잡아먹을 얼굴이네 따위와 아 다르고 어만 다를 뿐 일맥상통하는 언어폭력들.

아침부터 카톡에 전화에 나를 급하게 찾는 친한 동생과 근 1년 만에 통화를 했다. 요는 사업을 새로 시작한다는 내용인데, 사업자등록 방법 등을 묻는 무난하지만 검색 한번 하면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을 굳이 몇 번씩이나 전화해서 물어야 하나. 손가락 게으른 자식. 하고 타박 한번 하면 끝날수 있었던 통화.

문제는 때 늦은 안부를 물으며 하는 말이,

“누나는 예쁜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남자를 좀 만나. 아직까진 누나보다 한참 어린애들도 만날 수 있을걸”

이 두 문장에 얼마나 많은 불편하고 마음을 때려 맞는 듯한 표현들이 가득한 지 이 친구는 알고나 있을까. 유통기한이 하루라도 더 남았을 때 판매해야 하는 식품처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구매자를 만나야 한다. 아직까진 운이 좋으면 젊고 잘생긴 구매자를 만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누가 그저 가져가기라도 해 주면 그냥도 줄 수 있는 자리만 차지하는 폐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최근 몇 년간 나는 남편의 부재를 느끼고 익숙해져 가는 만큼이나, 사람들의 달라진 반응과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찔러보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익히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독서실에서 늦은 귀가를 할 때면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는 척하거나, 처음 보는 남자가 있는 자리에선 남편에게 물어보고요.라는 말을 일부러 하기도 한다. 가끔은 그냥 친절하게 대하는 것인데도 너무 예민하게 구는 공주병처럼 비칠까 그 경계가 난감한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자의 삶에서 공인된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한 실드이다. 내가 원하고 바래서 정해놓은 것이 아닌 사회가 나를 바라보는 암묵적인 실드인 것이다. 결혼 후 찔러보기를 겪어본 적이 거의 없는 내 삶에서 최근 몇 년 사이 평생 겪을 찔러보기를 경험했다면 그것은 정말로 내 행동 탓인가. 심지어 네 눈빛이 슬퍼 보여, 사연 있는 눈빛이야라며 그렇게까지 이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 알겠다 내 눈깔이 존나 커서 외로워디지겠다 라고 오해하게 생긴 내 눈깔 탓이겠지.


초등학생때 별명은 트위티였다. 그래 내 눈깔이 좀 불쌍하게 생겼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얘기들을 듣고 느끼는 나의 감정들이 기분 탓이고 누군가는 피해의식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나조차도 쏘아붙이고 화내기 전에 내 피해의식인 것인가 몇 번을 생각하니. 하지만 나는 이미 누군가의 공인된 소유라는 것에서 오는 편안함을 너무 오랫동안 느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안락함은 나의 의지로 느끼는 것인 반면, 누군가의 공인된 소유라는 것에서 오는 편안함은 사회가 그렇게 느끼도록 길들인 것이다. 남의 것을 뺏지 말자는 것이 마치 남자들 사이이 암묵적인 약속인 것처럼, 그 편안함은 내 일상과 사회활동에 굉장한 편리함을 안겨준다. 늦은 밤 아파트 입구에서 술 취한 남자가 내 팔을 붙들 때 오빠에게 자기야 라고 전화를 걸어 미쳤냐는 소리를 듣거나, 늦은 시간 여유로운 술자리를 하고 차를 타고 오는 길엔 잠든 친구를 깨워 도착할 때까지 통화로 귀찮게 한다던가, 유통기한이 지나서 판매가 공식적으로 완료되어 공지되지 않더라도 나는 썩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가고 있음을 항상 촉각을 세우고 보여주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엔 온통 유통기한 지난 우유 활용법이 넘친다. 왜 활용해야하는데? 정진아는 정진아꺼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를 위한 거짓말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