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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Jan 08. 2022

어쩌다 단식

220103



한 번쯤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단식'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자꾸 뭔가를 버리고 비우는 습관이 생겼는데, 할 수만 있다면 몸속도 싹 비워내고 싶었다.

기름기 많은 설거지를 할 때, 좀처럼 친해지기 쉽지 않은 물과 기름이 만들어 낸 두터운 기름막이 낀 수챗구멍을 볼 때마다, 내 목구멍부터 모든 장기에도 저러한 것들이 덮여 있을 거란 끔찍한 상상이 담백한 음식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마침, 매우 신뢰 로운 지인이 단식 일정을 공고했고 이참에 함께의 힘을 빌어 단식을 체험해 보고자 신청을 했다.

단식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긍정적인 느낌만은 아니다.

뭔가와 대치하는 느낌, 화가 난 느낌,

내가 굶으면 부모가 속이 상할 거라는 확신하에 어깃장으로 거르던 어린 날의 몇 끼니도 단식이라면 단식일 테고, TV를 통해 볼 수 있는 높으신 분들이 아주 가끔 머리도 박박 깎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며칠째 굶고 있다는 날짜까지 세어가며 곡기를 끊다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던 것을 단식투쟁이라 말하길래 무작정 굶는 것이 단식인 줄 알았었다.

이번 단식은 어깃장도 투쟁도 아닌 내 몸을 돌보는 단식이므로 세 단계로 구분하여 진행한다.

본단식을 위해 음식물 양을 줄이며 준비하는 기간인 전단식 3일, 물과 발효액 희석액, 차 종류를 제외한 일체의 음식을 끊는 본단식 3일, 생명 유지를 위한 외부 공급을 잠시 중단했던 몸을 보하는 보식 기간 6일 총 2주로 이번 일정은 이루어진다.

단식을 위해 준비할 것이 제법 여러 가지였다.

3년 이상 숙성된 좋은 발효액과 우리 콩으로 만든 발효 된장, 변비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마그밀정과 구충제, 그리고 염분을 제공해 줄 죽염과 동치미가 필요했다.

준비물로 일러 주신 좋은 면 옷, 질 좋은 된장과 소금, 발효액 등을 준비하면서 내 몸을 이롭게 할 좋은 면, 좋은 염분의 재료 등에 대해 그동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먹거리와 보기에 좋은 옷들을 선택하며 그저 빠르고 편하게 살려고만 했던 것에 다른 시각을 갖게 되며,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을 보면 유난 떤다는 말로 폄하하거나, 이 풍요롭고 스피디한 세상에서 느림의 미학을 좇는 사람을 융통성 없다고 치부한 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된다.

이번 일정을 이끌어주시는 전문가께서, 단식은 몸을 잠시 '죽이는 것'이라고 했다.

죽는다는 말에 뭔가 모를 비장함 같은 것이 올라왔다.

며칠 동안만 나를 '죽이는' 것에도 준비할 것이 많은 걸 보며, 끝내 찾아올 영원한 죽음 앞에서 평시에 준비해야 할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숙연해진다.

오늘은 전단식 1일 차였고, 삼시 세끼를 적은 양의 밥과 동치미 국물, 두부를 넣은 맑은 된장국만으로 먹었다.

더 힘 빠질 날을 대신해 필라테스도 한 시간 하고 왔고, 고양이 목욕도 시켜놓았다.

평소 밥을 많이 먹는 식습관은 아니어서 별로 힘들지는 않았지만 커피!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은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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