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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여 Mar 29. 2016

지금의 '나'로 오는 여정

돌아보는 나의 10대, 20대

아주 어렷을적부터 나는 내가 당연히 패션디자이너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한복을 만드시던 친 할머니 옆에서 천 쪼가리를 가지고 놀며 자랐고 무엇을 하던 평생 기술로 남을 일을하는 장인/전문가가 되라는 부모님의 조언이 그 밑거름이었다. 무엇보다도 만들고 그리기를 참 좋아하던 나는 당연히 디자이너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시절 어린 나에게 큰 감명을 준 MBC의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목표하나를 설정하고 보통의 남들과는 다르게, 유별나지만 고집스럽게 열심히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배경은 모든것이 불만인 중2, 학교를 관두고 옷만드는 방법을 배우겠다는 닶없는 생각도 잠시 가져왔지만 이 생각은 미대를 가자라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동네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며 500원 1000원 주고 사모은 패션관련 책과 잡지를 보고 그리며 유럽어딘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는 나를 꿈꾸었다.

중학교 3학년 봄, 영국에 사는 이모와 이모부를 둔 반 친구가 자신은 여름 방학 내내 영어공부 할겸 영국에 간다고 관심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제안해 왔다.
영국! 미래의 내가 활약할 그곳! 제일 좋아하는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가 영국인데, 중2때 부터 엄청 빠진 라디오헤드도 영국밴드, 런던에 엄청난 전통의 패션디자인 대학이 있다지? 나도 갈꺼다!

그날 당장 부모님께 친구의 제안을 알리고,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확정이 되기도 전부터 들떠서 나 영국 간다고 떠들고 다녔다. 주변의 몇몇 친구들이 조기유학 붐을 타고 하나 둘 한국을 떠날때 그를 너무 부러워한 나머지 쟤네들 재외국민특별전형으로 대학 쉽게 가려고 나가는 거라고 정당하지 못하다고 한 선생님께 질투섞인 불만을 털어놓았었다. 선생님은 그건 걔네 사정이라고 하셨지.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안와 어둠속에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던 어느 밤, 엄마가 살며시 들어와 자는줄 알았던 나를 깨워 말을 꺼냈다.

너가 가고 싶다는 미대준비를 위한 미술학원,  지금부터 시작하면 적지 않을 돈이 꾸준히 들어갈, 네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 거쳐야할 마라톤과 같은 것이다. 영국에 여름방학 한달 영어공부를 하고 오는 돈이 몇달치 미술학원비 일만큼 적지않은 돈인데 미안하지만 두가지 선택보다는 한가지를 신중하게 잘 선택하였으면 좋겠다.

나는 엉엉 울면서 미술학원에 가겠다고 하였다.
아쉽지만 그토록 바라는 조기유학이나 이민은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어쨋거나 한국의 미술대학을 가고 싶고 (보다는 갈수 있다는것을 증명하고 싶었고, 이를 이루지 못해 떠나는 해외유학을 원하지 않았다) 나중에 해외취업을 해 영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날 이후로 나는 종종 비행기에 오르는 꿈을 꿨는데 항상 이륙하기 이전에 깨거나 활주로만 빙빙 돌다가 꿈이 끝나버렸다.

나는 그림 잘그리는 동생을 둔 친구의 소개로 동네의 작은 미술학원으로 갔다. 입시가 요구하는 답을 가르치는 학원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나는 너무도 즐겁게 그림을 그렸고 고1 여름방학, 본격적인 입시미술을 위해 홍대앞의 큰 연계학원으로 옮겨가서도 어떻게든 덜 정형화된 수업을 하는 수시를 준비하는 포트폴리오 반에 머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결국에 지원한 수시들은 모두 똑똑 떨어졌지만 그동안 그림을 그리며 수시를 준비하며 굳이 패션디자인만 고집하고 싶지 않아졌다.

지원한 수시에 떨어졌으니 남은건 정시, 수능을 치루고 실기시험까지 막판 약 두달간 디자인반으로 내려가 하루 열두시간씩 손 팅팅 불려가며 기계처럼 그림그리다가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 공업디자인과에 합격하게되었다.

학교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좋은 동기들을 만났고, 미술학원 알바에 과외에 아주 어렵지 않게 돈을 벌며 학교와 가까웠던 집에서 집밥막으며 아주 편히 다녔다. 그렇게 삼학년 일학기 까지 학교를 다니다가 자퇴를 하였다.


어렷을적 부터 반드시 패션디자이너가 되야한다는 틀에 나를 맞춰가다가 입시 준비를 하며 그 틀을 깨버렸는데 대학생활 이년반은 내가 정말 평생하고 싶고 할 수있을 어떤것을 찾으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 전공과목이 즐겁지 않고, 잘 해낼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의지가 없었다. 다행이 나는 젊은 이십대 초반, 열심히 일하신 부모님 세대의 혜택으로 재미가 없고 자신이 없어 하고 싶지 않다라는 누가보면 배부를 소리를 해가며 휴학계를 쓸 수 있었다.

부모님 말로는 빨리 졸업하고 취직해 안정적으로 정착했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무모하게 모든것을 다 준비해 와서 일년간 나를 찾는 여행과 두고두고 필요할 영어를 익히기위해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겠다며 금전적인 도움을 달라고 하였다. 왜 한국에서,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네 자신을 찾을수는 없는지 너무 높은 기회비용인데 철도없이 가서 정착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해 (그당시는 학생비자로 주 20시간 아르바이트가 가능하였다). 너무 손 벌리지 않겠다며  혼자서 겁도 없이 갑자기 한국을 떠났다.

한국을 떠난 후, 이륙하지 않는 비행기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이꿈은 드디어 이륙을 하고 어딘가로 창륙을 하는 꿈으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바라던 영국에서의 시간, 소중한 이 기회, 매순간을 꿈속에 있는것처럼 후회없이 보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원래 적극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소심함에 절대 나를 붙잡아 두지 말자고.

런던 간지 삼개월, 스시집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시내의 큰 옷가게, 동네 까페, 학교 펍 (Pub)등 꾸준히 알바를 하였고 육개월만에 어학연수는 런던 미대유학 준비로 이어졌다. 런던의 대학진학으로 한국 대학의 휴학계는 자퇴서가 되었고 대학 졸업후 바로 취직을 하였다.


그렇게 일년을 계획했던 런던 생활은 올해로 구년차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오월, 같은 반 친구로 인연을 시작해 사년간 만나온 나의 짝과 곧 결혼을 한다.

시간은 나이와 비례해 점점 빨리 흐르는 것 처럼 느껴진다.

나는 하고싶었던것을 파고 들어갈수있었던 십대에, 오랫동안 바라던 나라에서 나를 찾아나가며 혼란스럽기도 한 이십대를 보낸것에, 이 모든것을 가능하게 한 건강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과 항상 나를 응원해준 가족과 친구들에게 아주 많이 감사하다. 만으로 서른이 될 올해, 이 여정은 혼란스러움보다는 여유로움으로, 영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둘이 하나가 되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나의 삼십대가 참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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