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줌마 관찰기>
꽤 마음에 드는 명함이었다.
출근을 하려면 노란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내려 하늘색 4호선을 타고 가다가 이촌역에서 청록색 경의 중앙선으로 다시 갈아타야 했는데 이 노선은 열차 지연이 제법 잦았다.
열차 지연으로 부득이 지각하는 날에는 촌각을 다투는 와중에도 역무소에 들러 열차지연증을 끊어다가 상사에게 제출했다. 지각이 고의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직장의 모든 상사가 그러하듯이 그도 나에게서 세금을 징수하듯 꼬박꼬박 죄송함과 굽실댐을 받아다가 본인의 정수리 볼륨을 채웠다.
그가 아침에 일찍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미니 고데기를 코드에 꽂아 앞통수와 뒤통수 볼륨을 채우는 일이었고,
내가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10리터 물을 길어다가 사무실 가습기를 가득 채우는 일이었다.
우리는 둘 다 싱글이었다.
나는 왼팔목에 찬 가죽 시계 외엔 다른 액세서리가 없었고, 그는 왼손 약지에 다섯 돈은 족히 넘는 24K 반지를 착용했다.
수십 년을 장기근속하는 직원이 대다수인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의 직장이었다. 그는 처세술이 뛰어났다. 자유로운 싱글보다는 안정적인 기혼의 느낌을 풍기는 것이 유리했다.
자발적 퇴사하지 않는 한 장기근속 기념 황금열쇠를 받아가며 정년까지 다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곳에서 수십 년을 일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턱턱 막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마음에 드는 명함이었다.
구내식당 밥도 맛있었다. 직원들 먹는 밥에 절대 재료값을 아끼지 말라는 회장님의 특별지시가 힘이 되어 12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매일 경기도에서 버스 한번, 지하철 한 번을 갈아타고 서울까지 출근했다.
싱글의 나는 굳이 기혼의 느낌을 연출하는 상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정말 아줌마가 되기 싫었으니까. 아줌마처럼 말하고 아줌마처럼 입고 아줌마처럼 걷고 심지어 아줌마처럼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뭔데?)
그러다 엉겁결에 나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 해 내 사주에 결혼운이 강했던가? (사주 본 적 없지만.)
당시 사귀던 사람과 올해 결혼을 하려고 한다고 보고했을 때, 상사가 했던 미묘한 축하가 또렷이 기억난다. 분명 단어는 축하였나 축복이었는데 표정엔 전혀 담기지 않은.
그해 겨울 예식장에서 “직장동료분들 모두 나오세요~” 하고 사진 촬영을 할 때에 왜인지 그 상사 혼자 하객석에 남아 사진 찍는 사람들을 쳐다보던 그 미묘한 표정도 또렷이 기억난다.
아. 난 진짜. 진짜 아줌마 되기 싫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