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능선과 구조대 헬기를 보다
이미 몇 번이나 온 길이라 이 뒤로는 제법 편안했다. 적당한 능선을 걷고 데크 계단을 오르자 금방 주봉이었다. 4시 28분에 두 개의 정상석이 보이게 사진을 찍고 미적지근한 닭가슴살을 뜯어먹었다. 정상에 도착하고 나니 그동안 거의 보이지 않던 등산객이 서너 명 보였다. 중년 남자들 세 명은 눈이 쌓여 마테호른처럼 보이는 바위 옆을 걸어다녔고, 청년 남자 한 명은 정상석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셀카봉까지 써서 오만가지 각도로 셀카를 찍어댔다.
(눈 내린 수락산 정상)
출발할 때는 홈통바위를 거치면 시간이 줄어드니 아예 둘레길까지 가볼 생각을 했는데, 완전히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내 걸음이 원래 느린데다 눈이 내려 걷기도 힘들고 설경을 찍어대느라 시간이 더 드는 걸 고려했어야 했다. 결국 나는 또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는 걸 목표로 하산을 시작했다.
(눈덮인 바위가 스위스를 방불케한다)
암릉과 기암괴석으로 소문난 주능선을 따라 하산하는 길은 예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기억에 선명히 남을 정도로 말도 안되게 힘든 길은 없었지만 짧은 데크길이 중간중간 한번씩 나온 것을 제외하면 편한 길보다는 거친 돌길이 많았다. 게다가 눈까지 쌓여 있어서 걸음이 매번 조심스러웠다. 분명 전에는 수락산 별 거 없네, 하고 대충 내려왔던 것 같은데 암릉 맛집이라는 게 허명이 아니었다.
(이름붙은 바위들이 설경 속에 늘어서있다)
그러나 힘든 것 이상으로 즐거웠다. 오렌지색으로 변한 태양빛을 받아 가까이선 철모바위, 코끼리 바위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고, 멀리선 수락산의 짙은 숲과 바위들이 적갈색으로 펼쳐졌다. 데크길로 된 조망점에서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자니 이토록 거칠고 광대한 자연의 한중간을 혼자 걷고 있다는 게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문득 두려움이 찾아올 정도였다. 마치 망망대해의 한 점이 된 자신을 조망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상과 동떨어진 이 미친 배경을 어떻게 가로지르나 하는 막막함도 찾아왔다. 멀리보는 여유가 두려움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익숙하게 해온만큼 다시 계속해서 걷는 것 말고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이미 여러 번 증명되지 않았나?
(모든 것이 주황으로 물드는 세상은 야간하산을 감수하더라도 볼 가치가 있다)
그런데, 5시쯤 광대하게 치마처럼 펼쳐진 암릉지대인 치마바위를 지날 때, 뜻밖의 산객들을 만났다. 산악 구조대원들이다. 다섯 명쯤 되는 이 영웅들은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통신을 하기도 하다 금방 내려갔는데, 전에 도봉산에서 봤듯이 사고자를 찾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문득 정상에서 온갖 사진을 수십장 찍어대던 청년을 떠올렸다. 나보다 약간 앞서서 하산하는 모습이 이따금 보였는데, 너무 빨라서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가 너무 경솔한 속도로 하산하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물론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일도 아니라, 나는 그대로 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45분쯤 지난 뒤, 헬기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맙소사. 진짜 산악 구조용 헬기였다. 그것은 특유의 굉음을 내며 날아오더니 고도를 낮춰 들것을 끌어올리고 다시 날아갔다. 헬기를 내려다보는 것도, 헬기의 매연 냄새를 맡을 정도로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해봐서 특별히 좋을 경험은 아니다. 들것에 실린 게 누군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누구든 부상이 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당연히 나도 헬기 신세를 질 일이 없기를 기원했다. 다칠 때 다치더라도 구조대가 산을 뛰어다니고 헬기가 날아올 정도로 다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역시 앞으로는 제때 아이젠을 끼는 게 좋겠다.
(비행중인 헬기를 직접 내려다볼 일은 많지 않다)
도솔봉 옆을 지나 불암산역이 가까운 도안사 방면으로 빠져나오니 6시 51분으로, 역시나 새카만 밤이 되고 말았다. 평소라면 심각하게 지칠 길은 아니었는데 눈길을 장시간 하산해서 진이 빠졌다. 오르막에선 아이젠과 등산스틱을 쓰면 넘어질 일이 별로 없지만 내리막에선 항상 뒤로 넘어질 걱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안사 옆으로 나가는 길은 완벽한 도로로, 고역으로 느껴질 정도로 걷기 지루하다는 점을 빼면 위험하진 않았다.
그리하여 수락산의 익스트림 코스를 완주한 나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다 불암산역 근처에서 아담하고 적당히 생활감이 묻어나는 국밥집에 들어갔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집으로, 먼 옛날 시골집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 파리 한 마리 없고, 있더라도 벽에 앉지 못할 정도로 말끔한 신식 식당과 정반대에 있는, 아주 대범하게 돌아가는 가게다. 합판 테이블 끝의 코팅은 다 일어났고 구석에는 잡동사니와 식재료가 대충 쌓여 있는게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이런 집이 맛 말고 무얼 신경쓰겠는가? 실제로 순대국밥을 시켜보니 건더기도 푸짐하고 맛도 깊이 우러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나온 나물이 맛있었다. 고사리는 내가 식당에서 결코 손대지 않는 음식인데 시험삼아 먹어보니 고기처럼 쫄깃하고 은근한 향이 나는게 제법 맛있었다. 수락산을 오르고 또 올라도 새로이 보이고 배우는 부분이 있듯이 똑같은 나물도 다시 먹으면 새로운 맛을 배울 수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감탄을 곱씹으며 식사하는 동안, 나는 다시 가볼 만한 산, 다시 고칠 원고들에 대해 생각했다. 똑같은 짓에서 뭐든 배울 게 생기는 날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더 바랄게 없으련만.
교훈
표지판이 나오면 반드시 위치와 방향을 확인할 것. 신나게 걷다 표지판을 놓치는게 헛걸음의 원인 반 이상을 차지한다.
아무리 눈밭이 귀찮아도 눈밭에선 아이젠을 착용할 것. 아이젠 아끼고 귀찮은 거 피하다 수백 시간과 아이젠 수백 개 값이 날아갈 수 있다.
산에서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보며 움직이는 건 운전중 스마트폰 조작만큼이나 위험하다.
부록: 초보일수록 좋은 장비를
서울 근교의 명산을 다 다녀보고 생초보에선 벗어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다양한 등산 장비를 시험해보면서 하게 된 생각은 역시 초보일수록 좋은 장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오르는데 두어 시간 밖에 안 걸리는 산을 가는데 무슨 고급 장비가 필요하냐, 크록스 신고도 잘만 가더라...... 이런 조롱 섞인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 나 역시 면 소재만 피한다면 동네 산책할 때 입을 만한 트레이닝복과 바람막이 차림으로도 어지간한 산은 충분히 다닐 수 있다는 걸 체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과 안전을 생각하면 역시 좋은 장비를 써야만 한다. 근래에 들어 역체감으로 절실히 배웠다. 패션용 부츠를 신고 북악산을 가보니 확실히 체감이 되었다. 접지력은 둘째치고 2만 걸음만에 발바닥이 아파서 슬슬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등산화를 신고는 한양도성 종주도 문제 없이 할 수 있었으니 차이가 상상 이상이다.
마찬가지로 북악산에서 느낀 것인데, 등산스틱을 모두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에게 빌려주고 발로만 걸었더니 당장 하산할 때 완치되지 않은 무릎에 시큰한 감각이 스쳐갔다. 다음날 이물감이 심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에 운동과는 완벽히 담을 쌓고 살던 그 친구는 ‘이만하면 다닐만 하다’고 했으니, 등산 스틱의 역할도 상상 이상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배낭은 어떨까. 그 정도는 대충 있는 거 아무거나 써도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진 않지만, 물과 옷, 음식 따위를 넣어서 서너 시간 걷다 보면 어깨와 등이 슬슬 아파온다. 북악산에 간 날, 나도 이 정도 가벼운 산행쯤이야, 하고 가벼운 여행용 백팩을 가져갔다가 나중에 등이 피곤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등판 쿠션도 튼실하고 무게를 골반으로 분산해주는 힙벨트가 있는 녀석을 쓰는 게 호들갑으로 보이더라도 고통 경감에 필수적이다.
여기에 고어텍스로 대표되는 하드쉘도 있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많은 등산가들이 하드쉘은 자기도 안 쓴다거나 딱히 안 사도 된다고 하고, 나도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튼튼하고 조밀한 나일론 바람막이만 있어도 가벼운 눈비와 바람을 막을 수 있다. 완벽한 방풍을 바란다면 고어텍스보다 저렴하고 가볍고 관리도 편한 고어 윈드스토퍼(고어텍스 인피티움) 재킷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고성능 제품을 시험해보니 확실히 고성능 하드쉘이 편하다. 핏집(겨드랑이 밑 지퍼)가 있는 고어텍스 XCR(고어텍스 프로의 전신) 재킷을 입으면 땀이 날 정도로 열기가 오르는 와중에도 핏집을 열고 적절히 몸을 식힐 수 있다. 한참 걷는 와중에도 살살 서늘해진다. 일반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을 때는 어지간히 추운 날씨가 아닌 한 느끼기 힘든 쾌적함이다.
5도에서 15도를 오르내리는 요즘 날씨에 여러 장비의 느낌을 테스트해본 결과, 이 ‘몸이 다시 서늘해지는’ 느낌은 고어텍스 XCR에서만 유지된다. 고어텍스 팩라이트와 윈드스토퍼는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해 더워지고, 핏집이 있는 일반 방수재킷은 핏집을 열면 걷는 동안만 바람이 통해 서늘해진다. 멈추면 바로 덥다. 요컨대 투습 성능이 좋고 환기가 잘 될수록 적절한 체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쉽다는 말이다. 물론 제때 벗고 다시 입어준다면야 비닐 비옷만 있어도 충분하겠으나, 초보일수록 자기가 추운지 더운지 체감하기 어렵고 체감해도 귀찮아서 입거나 벗지 못한다. 당연히 찬바람에 몸이 식어 건강을 해칠 위험도 높아진다.
정말로 대충 싼 것을 써도 성능 차이를 체감하기 어려운 건 의외로 패딩이다. 오히려 싼 게 좀 더 나을 지경이다. 이는 다운 패딩의 문제점에 기인하는 현상인데, 이것도 실험으로 체감해봤다. 필파워 900짜리 경량패딩을 입고 약간 따뜻하다 싶은 상태에서 하산해보니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패딩의 어깨와 등이 땀에 젖어 완전히 납작해졌다. 솜털이 다 엉겨붙었기 때문이다. 이러면 이 부분은 보온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중고로 5000원에 산 웰론 패딩은 입고 신나게 뛰어다녀도 더워질 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 정도면 영하권에서 땀이 나도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 다운 패딩보다 저렴한 합성솜 패딩이 땀나는 환경에선 훨씬 낫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물론 비싸고 훌륭한 합성솜 패딩은 더 가볍고 얇고 압축이 잘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수십만 원의 가격차이를 감수할 정도는 아니다. 그 차이를 민감하게 체감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좀더 극한상황을 즐기는 전문가들이니, 초보는 일반 패션 브랜드의 합성솜패딩을 쓰는 게 낫다는 게 패딩에 대한 결론이다.
그나저나 예전에는 ‘이렇게 저렴한 일상용 장비로도 등산은 충분히 잘 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힘을 실었는데 갑자기 ‘역시 좋은 게 좋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물론 건강 때문이다. 내 건강은 내가 부지런을 떨어 요령 좋게 챙기면 그만이지만 남의 건강은 부지런히 챙기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곤경에 처해보면 뭐가 중요한지 알고 보완하게 되지만 초보는 곤경에 처하고 나면 때려치우고 탈출해버리니 돈으로 예방할 수 있으면 예방하는 게 낫다. 기합과 요령으로 어떻게든 이겨낼 수 없는 영역이 많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도 슬프지만 새로운 발전이다. 아마 아웃도어 시장을 유지하는 기둥 중에는 이런 깨달음도 있지 않을까........
추신: 서울 등산로 추천 정리 페이지를 작성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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