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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arti 아띠 Jan 07. 2021

시 낭독

눈이 내렸다.

곧바로 떠오르는 시가 있었다. 유일하게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시다. 그것은 바로 기형도의 "밤눈"이다.



이 시는 소리 내고 읽지 않을 수가 없다. 혼자서 낭독해본다. 낭독할 때는 시집을 보지 않고 허공을 쳐다보고 상상해본다. 내 앞에는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고, 얼음 속에 가지들은 겨우 실눈 뜨고 있다. 바람에 미친 듯이 휘날리는 밤눈들은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목이 메이지 않았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이 시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시도 때도 없이 읽었다. 그러나 언제나 여기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눈물이 난다.


마침, 오늘 저녁 아빠가 시 한 편을 보내줬다. 제목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마음을 아셨는지, 아빠 또한 우연히 "밤눈"이라는 시를 보내주셨다. 그러나 김광규의 시로,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서로에게 따스한 방이 되고, 서로 감싸주고 온전히 안아주는...


너무 아름다운 시였다. 기형도의 "밤눈"에서 오는 가슴 아린 느낌을 마치 감싸주는 것 같았다. 단어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 낭독해봤다. "서로의 집 안으로 들어가"라는 부분에서 실제로 내 몸이 따뜻한 난로가 있는 방에 들어가 몸이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이 밝을 때까지, 밤새도록, 누군가의 품속에서, 누군가가 내 품속에서 위로와 사랑을 주는 느낌을 받았다.


난 시가 정말 내 인생의 생명수와 같다. 기쁠 때도 절망할 때도 바쁠 때도 아무 생각 없 때도 시가 내 친구였다. 그러나 시는 내 입 밖으로 내뱉어야 생명력이 생긴다. 마치, 배우가 대사를 소리 내서 읽어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큰 영감이 되어준 책 <연기하지 않는 연기>에서 저자는 대사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는 마치 내가 시를 읽었던 식과 비슷했다.  그는 "대사에 푹 빠져 들도록 떠오르는 말과 생각과 이미지들이 나를 자극하게 놔둔다. 상상력이 발휘되고, 나는 작가의 글에 지적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연결된다"라고 말한다. 그저 시를 읽듯이, 대사가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 분석하기에 앞서 이 대사가 내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가슴으로 느끼고 반응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지면에서 떼어놓기"라고 표현한다. "눈 앞의 구절이나 문장이 그 순간에 어디로든 나를 데려가도록 자유로이 놔두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여태껏 연기 수업에서 독백이나 장면 연기를 준비하면서 정말 힘들었다. 대체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왜 이 캐릭터는 이렇게 해야 하는지, 왜 난 느껴지지 않는지, 등 고민하면서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하자 자괴감이 커져갔다.


배우가 먼저 '의식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사실 배우에게 의식적인 순간이 많아질수록
넘치는 영감을 경험할 기회는 적어진다고 믿는다.


오늘 시를 낭독했듯이,

대사를 읽을 때 단어와 구절을 내가 먼저 느끼고 이를 숨김없이 부끄럼 없이 검열 없이 내뱉으면 될 것이다. 내가 기형도의 "밤눈"에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라는 부분에서 눈물 날 때 아무도 '너 왜 거기서 눈물 나? 슬픈 부분이야? 왜 하필 거기서 울어야 하는 거지?'라고 하지 않는다. 대사도 이러한 접근을 해야 될 것 같다.


내 다이어리에 유일하게 기형도의 밤눈이 필사되어있었다. 꼭 간직하고 다녔던 것이다. 조금 전, 김광규의 밤눈을 바로 밑에 필사했다.  이제서야 내 마음속에 '밤눈'의 형상이 완성된 느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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