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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Aug 23. 2016

'도시락'의 ㄱ을 기억하기

'도시락' 컵라면의 급진성과 기억의 정치학

    팔도 도시락은 급진적이다. 그건 이름을 ‘도시락’이라 정한 데서부터 드러난다.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서양음악의 음계를 거꾸로 되뇌어봐야 한다. ‘도시라솔파미레도’ 이것을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는 경제개발의 구조라 생각해보자. 한반’도'의 국가 주도형 근대화 및 산업화 개발 과정은 ‘시' 단위로 나뉘어 철거하’라’는 명령형 어미로 하달된다. 그러면 용역이든 누구든 거느리고(솔) 부수어(파) 주민들을 다시금 ‘미’생으로, 가엾은(‘레’ 미제라블) 이웃으로 쫓아내고, 그 위에 근대의 투시법 원리에 맞추어 정갈하고 반듯하게 새로운 길(도)을 닦는다. 이중에서 받침(종성)이 있는 것은 ‘솔’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 법이 겉으로 집행되는 직접적인 과정으로서 ‘파’로 가기 직전, 그 폭력적 간극을 부드러운 유음으로 흘려버리려는 고도의 술수일 것이다. 사실 ‘ㄹ’은 ‘근’에 대한 야민정음으로서 ㄹ혜를 상지ㅇ.....야옹! 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근대화’의 첫 글자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위(국가)에서 아래(개인)로 퍼부어지는 근대적 산업화 개발 과정은 아주 막힘없고, 그만큼 교묘하다.


    하지만 ‘도시락’을 보면 도시라, 에서 ‘ㄱ’으로 막혀 있다. 목구멍을 막아 원활한 음계의 하강을 방해하는 ㄱ은, 국가 주도의 근대적 산업화 프로젝트라는 불도저(거대서사) 아래 삭제된 기억(소서사)을 나타낸다. 여기서 얕게나마 공포영화 담론과 ‘도시락’의 연관성이 생긴다. 공포영화의 내러티브는 무엇이 공포가 되는가, 또는 누가 괴물이 되는가의 문제이다. 이 공포, 괴물의 정체를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공포영화는 근대성의 폭력을 고발하는 가장 급진적인 장르가 되는데, 공포영화의 괴물은 억압된 것들이 압축(은유)되고 전치(환유)되어 귀환한 것이기 때문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비체abjection’ 개념을 통해 공포를 설명하는데, 비체(卑體)는 언어라는 상징 질서 안에 들어올 수 없는 것들이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은 알 수 없으며, 그래서 지배할 수 없고, 그만큼 두렵다. 또한 이는 우리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 즉 침, 땀, 토사물, 월경혈, 배설물 등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몸의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근대적 의미로서의 장애나 손상 없는 통합적인 육체 개념을 끊임없이 침범한다. 총체적 몸에 대한 믿음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해체된 몸, 상처, 비정상적인 몸놀림 같은 것들 역시 비체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몸 ‘안’에서 나온 것은 몸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말 그대로 우리 존재가 소멸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때문에 비체는 그 자체로 죽음에 대한 은유이며, 그래서 근대적 상징 질서로 다스릴 수 없는 괴물이 된다.


좀비를 통해 '비체'를 생각해보자.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고, 기괴한 몸으로 기괴하게 걸으며, 입으로는 끊임없이 피나 침을 흘린다. -사진출처: pixabay


    특히 백문임은 한국의 공포영화에 나타나는 여자 귀신을 분석한다. 그녀에 따르면 한국 공포영화의 여자 귀신은 식민지 시대 혹은 박정희 정권 국가 주도의 근대적 산업화 프로젝트 과정에서 억압된 존재들의 귀환이다. 우리는 근대화가 가져다준 달콤한 열매를 누리며 살아간다. 근대화를 통해 경제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유례없이 발전했다. 이제 한국은 문화수입국이 아니라 문화수출국이며, 한국의 여권이 자주 도난당하고 비싸게 팔릴 만큼 그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로 몰린 이들 중 여성은 경제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래서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꾸릴 수 없었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맞춰 결혼하고 안전하게 부르주아의 질서로 편입되지 못한 이들은 생계를 위해 홍등가에서 일하거나 공장에 취직해야 했다. 이렇듯 찬란한 경제발전 이면에는 창녀와 노동기계라는 억압된 비체들이 있었다.


    이런 모습은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잘 드러난다. 부르주아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 동식은 음악교사로 일하고, 아내는 집 안에서 재봉틀을 다루며 가사 외에 추가적인 노동을 한다. 동식은 아내의 가사노동을 덜어주기 위해 공장 여급 중에서 하녀를 구한다. 동식의 피아노를 아무렇게나 치고, 베란다 밖에서 안쪽을 자주 쳐다보는 하녀는 부르주아 질서 안으로 편입될 수 없는 비체로서의 하녀를 보여준다. 또한 하녀는 동식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사태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데, 이는 섹슈얼리티로 남성을 유혹하여 위험에 빠뜨리는 팜므파탈-창녀로서 재현된다. 한편으로 아내는 비인간적이다 싶을 정도로 묵묵히 재봉틀을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현모양처이면서 동시에 노동기계로 재현되는 여성의 양상을 드러낸다.



영화 <하녀>의 한 장면. 관객들에게 '나쁜 년' 소리를 숱하게 들었던 하녀는 팜므파탈 여성으로서 재현된다. -사진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이제 ‘도시락’의 디자인을 보자. 상자의 배경에는 도시의 야경이 반짝이고 있다. 하늘의 불빛까지 땅으로 끌어오는 데에 성공한 근대적 도시의 모습이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끄는 저 빛나는 밤의 마천루들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기약없는 야근으로 한 땀 한 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경제적 성장을 위해 개인을 억압하는 착취의 구조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고발한다. 또한 ‘어머니의 마음’을 이야기하며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데, 동시에 도시락을 든 ‘어머니’의 모습은 산업화 과정에서 폐병에도 불구하고 공장에서 먹고자며 밤낮없이 노동해야 했던 여공의 복장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능히 끼니로서 기능해야 할 ‘도시락’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컵라면 하나만 제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다. 현모양처이자 부르주아 중산층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로 안착된 틈에서 태어난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집밥’ 같은 모성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다. ‘도시락’에서의 ‘어머니’는 그런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웃으며 끼니 대신 컵라면을 건네는 섬뜩한 자상함으로써 스스로를 비체화한다.


    용기가 원형이 아닌 사각형, 그것도 직사각형의 디자인인 점도 흥미롭다. 원형은 모나지 않고, 그래서 걸리지 않는다. 바퀴가 원형인 이유는 가장 빠르고 매끄럽게 잘 굴러가기 때문이고,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의 서구철학 사유의 끝에서 ‘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근대 이전까지의 원환적 체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반면 사각형은 어떤가? 한껏 모나 있다. 심지어 ‘도시락’은 직사각형으로, 안정적이고 통합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크게 비웃는다. 겉으로 보이는 ‘도시락’의 모든 디자인은 그 함의까지 더하여 급진적이다.


이 급진적인 디자인을 보라! 복고적인 컨셉은 그 자체가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사진출처: 팔도 홈페이지

 

   한편으로 ㄱ(기역)이 ‘기억’이 되는 과정 자체도 이런 거대 서사 아래 억압의 과정을 보여준다. 획 하나 차이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음성학에서의 최소 대립쌍minimal pair을 말한다. 조음 기관과 방법에 따라 가로세로 그리드로 나뉘어진 음성학 표에서 한 칸 만한 위치를 배정받는 것이야말로, 공장에서 자신의 재봉틀을, 회사에서 자신의 노트북과 한 칸의 파티션을 차지하는 지금 여기 우리 및 억압된 과거 모습에 대한 은유다. 억압되었으나 끝없이 돌아와 위로부터의 경제발전 개발 논리를 연신 가로막는 ‘ㄱ’은 치열한 기억의 정치학이다. 앞에서 끼니 대신 ‘도시락’ 컵라면을 건네는 ‘어머니’가 비체화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비체스러운 모습을 하나 알고 있다. 구의역에서, 끼니 대신 컵라면을 가방에 넣고 급하게 작업하다가 가버린 젊은 노동자 말이다. 우리의 인식에서 깨끗이 삭제된 존재들은 이렇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사건으로 돌아와 우리를 일깨운다. 경제 논리로만 살아온 우리의 역사는 오롯한 승리와 성공의 역사가 아니고, 어느 정도의 억압을 애써 덮고 목소리를 지우며 살아온 매혹과 불안의 역사라고. 비정규의 미생, 비체로서의 삶이 더욱 익숙해진 오늘날 ‘도시락’은 우리 시대의 실패한 모습을 계속 꺼내어 눈 앞에 대고 흔든다. 거기에서는 ‘에밀레-‘하는 구슬픈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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