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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Nov 04. 2016

헬륨 오딧세이

부끄러움에 대한 어떤 소고

"사람들이 절대적 통치권을 전지전능한 것이라고 상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통치권 자체가 육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가 낳은 결실인 막내딸 코델리아를 잔인하게 내치면서, 리어 왕은 권력이라는 가장 지독한 물질 속에 자리하고 있는 탈물질화(탈육화)의 환상을 드러낸다. 이 순간에 리어 왕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정체성은 그 중요성을 측정할 만한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텅 비어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자신의 통치권을 전 세계에 행사할 수 있게 된 국가는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실, 알기나 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이런 국가는 자신을 아는 데 필수적인 타자를 제거해왔으리라."


-테리 이글턴, <이론 이후>, 7장 '혁명, 토대, 근본주의자' 중에서


    권력에는 몸이 없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이 완전하다 믿을수록 스스로의 물질성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자체로 죽음, 한계, 불가능성을 내포한 물질/육체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은 헬륨 풍선을 닮았다. 안과 밖을 나누는 풍선의 조밀한 막 안에는 텅 빈 공기만이 들어차 있다. 붙잡아줄 손도 없는 채 공활한 하늘로 끝없이 오르는 풍선은 높은 기압에 점점 부풀어 오르고, 결국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터져버린다. 하지만 그 파괴는 어느 누구의 날카로운 공격도 아닌, 오직 스스로의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이 바로 그 헬륨 풍선이다. 사실 그의 일생은 탄생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탈육체화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 월남전, 공장의 여공들, 지하실의 폭력과 죽음들, 이외에도 들려지지 않은 서발턴의 목소리들을 그림자로 하여 경제개발의 찬란한 빛을 연성해냈다. 검은 선글라스는 아마도 그 비정상적인 밝기를 피하기 위해 양심의 어긋난 명령으로 쓴 면죄부였으리라.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그는 아버지의 남근성만을 제거한 공주로 자랐다. 시바스리갈과 여대생, 너 이자식 건방진 발터의 호탕탕함이 한바탕 지나간 후, 무너질 뻔한 세계에서 그에게 다가온 것은 헬륨 가스를 머금은 사이비 종교의 목소리였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듯, 그는 도날드 덕 같은 그 목소리를 따랐다.


    헬륨 가스로 변하는 목소리는 곧 사라질 수밖에(Soon失) 없다. 하지만 이미 함께 헬륨을 머금은 그는 다른 손길을 거부한 채 뿌리(ㄹ)를 박차고 떠올랐다. 중간중간 그 우스운 가금류의 목소리로부터 깨어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헬륨을 마셨음은 물론이다. 머금은 헬륨은 비행을 부추겼고 위로 올라갈수록 헬륨은 부풀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고 평온했을 것이다. 고개를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그는 그 찬란한 태양에 깃든 맑은 혼을 느끼며 창조적 미래를 꿈꾸었다. 다른 어둠과 그림자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고, 어차피 위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우산을 든 적은 없지만 비를 맞지도 않았다. 대기권 어딘가에서 보이는 바다는 가라앉는 배조차 점처럼 보였다. 사람이 물에 빠지거나 물을 맞는다는 것을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그것이 심지어 죽음까지 부른다는 것은? 아니, 죽음 자체는? 아버지가 끝없이 기념되고 되새겨지며 자신의 단단한 지지율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제는 서울 한복판에 동상으로 귀환하려 하는 판에, 그의 세계 속에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창창한 상승에서 자신의 뿌리는 어디로 갔을까? 땅에 붙어있는 이상 언젠가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그 물질성 말이다. 알 길이야 없지만, 그의 유체는 능숙하게 그 죽음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마음 속에 메트로놈을 하나 놓고 달그락, 딱. 하는 템포로 꾸준히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하긴 이렇게 꾸준히 공급되는 헬륨도 어찌 보면 그의 능력이라 할 수도 있겠다. 거기에서 오는 붕 뜬 자신감이 그로 하여금 ‘그래서 대통령 되려는 거 아니냐’고 되묻도록 만들었으니.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되려는 것 아닙니까?

    어느 여대에서 일어난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이 공허한 비행에 올가미를 던졌다. 뿌리를 지키려는 땅의 외침이 중력을 일으켰다. 몇 번의 말들이 오가고 얼마간의 뉴스가 방송되었다. 몇몇 사람이 소환되고 보니, 충분히 떠올랐다 생각한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들이 있었다. 그 고리들에 이끌려 땅으로 내려온 그는 생애 최초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생후 몇 개월 동안, 양육자와 함께하는 아이는 전지전능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양육자가 자신의 모든 욕구를 바로 채워주지 않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이는 대상과 자신을 구분한다. 여기서 아이가 자신의 전지전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은 대상에 대한 공격적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이 의존적인 존재이며,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누스바움은 이런 측면에서, 부끄러움을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가 느낀 부끄러움이 이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그래서 대통령 되려는 거 아니냐’고 묻던 때, 이미 육체가 없는 권력자의 공주로 태어나 살다가, 그 고착된 전지전능성의 환상이 깨질 뻔한 사건을 겪고도 헬륨가스에 힘입어 쉽게 날아오른 때, 그럼으로써 모든 어두운 그림자에 공격성을 쏟으며 자신의 불멸을 되뇌던 때의 자신으로 있을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농단이, 1년을 앞둔 지금에 와서 곧 잃어버릴(Soon失) 것이 되었다. 오직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의 한 마디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적인 자괴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사과는 국민을 향해 있지 않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말은, 그들에게 실례나 해악을 끼쳤다는 데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이제는 헬륨을 아무리 채워넣어도 떠오르지 못하게 되어버렸다는, 전지전능성의 상실에 던지는 값싼 변명이다. 돌이킬 수 없는 화양연화는 ‘이러려고’를 통해 ‘자괴감’의 제단에서 뜨겁게 불태워진다. 그리고 그 연기에 힘입어, 그는 또다시 떠오르려 한다. 아니, 내려오지(下) 않으려 한다. 내려오려 하지 않는(非) 그의 태도는, 왜 저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는 나라에 살고 있나 하는 자괴감을 역으로 온 국민에게 심음으로써 그들을 간접적으로 비하한다. 그리고, 그리 하야, 그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세상을 낮춰가면서, 대지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이탈하며,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며, 아니 사실 존재는 하되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어찌 되었건, 아마도 그는, 적어도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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